
유리알처럼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아침, 친구를 찾으러 넓은 들로 나간 하루살이는 마침 메뚜기를 만났습니다.
이내 친해진 그들은 즐겁게 노느라 밤이슬이 내리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윽고 땅거미 내려앉은 어두운 밤이 되자 메뚜기가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살이야, 오늘은 그만 헤어지고 내일 만나 다시 놀자.”
“그런데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응, 내일이란 이렇게 깜깜한 어둠이 지나고 다시 환한 아침이 찾아 오는 때를 말한단다.”
메뚜기가 아무리 쉬운 말로 열심히 설명해 보았지만, 하루살이는 도무지 ‘내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엔 엄연히 ‘내일’이 존재하건만….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는 분명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사는 무리가 있는 반면, 소망의 하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마치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던 하루살이처럼.

당신은 내일을 몰랐던 하루살이처럼 하나님을 만날 아무런 기대도 준비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벧후 3:13-14]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 '주님의시선' 카페와 카페지기가 섬기는 '마산시민교회'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종말의 때를 사는 자세 (본문:벧전4:7)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결산의 때, 종말의 때가 가까워 왔다고 증언합니다.
주님의 재림과 심판으로 시작되는 종말의 때는 성경의 중심적인 메시지요, 우리 신앙의 큰 진리며, 성도들의 삶의 소망과 기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 때를 대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결실기에 앞서서 고난의 시기가 먼저 있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홍수와 더위와 기근의 계절이 지난 후에 비로소 결실이 가능하듯 성도의 최후 승리가 이루어지는 종말에 앞서 성도와 교회를 연단하는 어려운 시기가 곧 종말 직전의 시기요, 그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마지막 고난의 때를 굳건하고 슬기로운 신앙 자세로 극복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승리를 얻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종말의 때를 사는 성도의 지혜로운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기를 분별해야 합니다(롬13:11)
1)늘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함 성경에는 종말의 시기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그 때와 시기는 주님 자신도 모르시며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권한에 있다고 하셨고(마24:36), 성도들이 관여하여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행1:7). 그러므로 종말의 시기와 관련하여 성도는 다음가 같은 극단적 자세를 피해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사사롭게 그 때를 추론하고 그것에 모든 신앙 생활의 초점을 맞추며 사는 자세입니다. 또 반대로 종말 진리에 관해 무관심한 자세도 피해야 합니다. 전자는 교회와 사회에 큰 혼란과 피해는 주는 맹신적이요 광신적인 것이며, 후자는 무사 안일한 세속적 신앙 의식으로서 세상과 혼합될 우려가 많습니다. 종말의 시기에 대한 구체적 증언이 성경에 없다는 것은 그것을 인위적으로 알아보도록 하라는 뜻도 아니요, 반대로 그 시기를 무시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 시기를 모르니 신앙 안에서 늘 그 시기를 맞을 준비와 자세를 지니고 깨어 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오늘 당장이라도 나와 이 세계에 주님의 결산의 때가 닥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참된 신앙 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2)복음 진리를 따라 분별해야 함 그 시기에 대해서는 우리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분별할 수 있는 길을 주님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 날은 도적같이 온 세상에 임하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돌연한 일로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살전5:1-5). 그 날을 미리 분별하고 대비할 수 있는 징조를 성경은 밝혀두었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 진리를 믿고 그 원리 안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시대를 분별한다면 종말이 임하는 시기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날이 닥칠 것을 알 수 있는 징조는 어떤 것일까요? 성경 전체를 볼 때, 사회의 극심한 도덕적 타락, 국가와 민족간의 큰 전쟁, 큰 자연 재해, 교회 안에서의 배교와 이단이 창궐 등이 종말의 징조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징조들이 종말에 관한 절대적 증표는 아닙니다. 다만 종말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적 징조입니다(마24:5-8). 그 징조들은 벌써 우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성도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말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확실한 증표로서의 결정적 징조는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 진리의 만국 전파'(마24:14)와 '적그리스도의 출현'(마24:24;살후2:3)입니다. 복음이 온 만국에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되어 온 세상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을 때, 즉 사단의 본색이 완전히 드러났을 때 주님의 재림과 심판이 시작되는 것은 순리적이며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기의 분별도 이와 같은 성경의 복음 진리 안에서 분별해야 올바른 종말관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고전10:11)
1)세상 풍조를 경계해야 함 오늘이 우리가 봉독한 본문에서도 마지막 때에는 근신할 것을 명합니다. 근신이란 지키고, 삼가고, 경계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성도들은 먼저 세상의 풍조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풍조, 죄악을 합리화하는 불의의 풍조, 온갖 더러운 것을 밥 먹듯 하는 반윤리적 풍조가 그 도를 더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새벽 미명이 가장 어둡듯이 주님 재림이 임박한 때도 세상에 적그리스도적인 풍조가 가장 극심할 때입니다. 교회도 그와 같은 풍조에 물들게 되어 이단, 미신, 물신 숭배, 배교, 분쟁의 악폐가 많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먼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마24:4)할 것을 명합니다. 적그리스도, 비성경적인 사람들의 거짓 진리, 거짓 가치론, 거짓 행복론에 미혹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말세일수록 더욱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약속만을 절대 진리로 의지하는 자세가 곧 세상의 반기독교적 풍조를 경계하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2)자신을 경계해야 함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5:6). 성도들은 외부의 핍박과 환난과 유혹보다도 자신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신앙적인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말세에는 배교, 타락하는 성도들이 속출할 것임을 성경은 증언합니다(딤전4:1);딤후4:4). 주님의 재림이 지연될수록 세상의 불의한 권세는 날뛸 것이며 교회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와 같은 현상으로 인해 신앙에 회의와 혼란이 오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성도들이 많아질 것이요, 신앙 생활도 패배 의식, 혼합 의식으로 행하는 성도들이 생길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현재 우리의 교회내에서도 발견됩니다. 따라서 장차 배교하거나 타락하는 성도들이 많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진리보다 비진리, 의보다 불의가 득세한다 해도, 또한 의롭고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 거미처럼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는 사람들이 잘 산다고 해도, 교회보다 세상의 권세가 더 영화롭게 보일지라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종말의 한 현상일 뿐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고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과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3. 자기 사명에 더 충실해야 합니다(딤후4:5)
1)맡은 일에 충성을 다함 성경은 종말의 때가 왔을지라도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미신적인 종말론을 신봉하는 사람들 중에는 오직 새로운 세계만 바라보고 현실 세계에서 성도로서 또 사회인으로서의 본분과 의무를 등한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세는 비신앙적입니다. 종말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자신이 현재 맡은 일이 성실을 다하는 것이 성도의 참된 자세입니다. 주님은 맡긴 일은 주인이 올 때까지 열심히 하는 청지기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눅12:42,43). 오히려 받은 달란트를 활용치 않은 종을 엄벌에 처했습니다. 기독교의 종말관은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단절된 종말관이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아무렇게나 해도 저 세계로만 가면 상관없는 비윤리적이며 맹목적인 종말관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나 저 세계에서나 하나님께서 주신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기독교의 종말적 윤리입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세에서 진실하게 그 의무를 다하는 성도만이 영원한 내세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 사회, 교회에서 자신이 맡은 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을 더 충실히 감당하여 주님 오실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합시다.
2)더 열심히 사랑함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했습니다. 말세가 임박할수록 세상에는 사랑 대신 이기적인 풍조가 극심하여 냉정한 세상이 될 것임을 주님은 예고하셨습니다(마24:12). 이슬비에 옷 젖는 것을 모르듯 성도들이 종말적 풍조에 젖게 되면 자연히 사랑이 매마르게 됩니다. 세상도 교회도 사랑이 식어지니 성도의 의식에 남는 것은 자기 보호 의식, 피해 의식만 더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지니고 행해야 합니다. 사랑을 잃은 성도는 곧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종말적으로 가야 할 그 세계는 이웃과 하나님을 온전하고 자유롭게 사랑하는 자들만이 거할 수 있는 곳입니다.
결론 캄캄한 밤에 별은 더욱 빛나듯이 도래할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들은 더욱 거룩하고 경건하고 사랑의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