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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어떤 일의 출발선 상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화려함이라든지 거창함따위가 아니다. 이런 것이 우리를 목적지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시작은 미약했음에도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작은 잘 하였으면서도 마침은 멸망이 되고 마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요란한 출발이 성공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겨자씨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큼 크지도 귀하지도 않다. 그것은 아주 작은 축에 드는 씨앗일 뿐인데 땅에 심겨지면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크게 된다.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정도라면 나무처럼 자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하겠다. 외모를 갖추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희망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능력이다. 믿음이 있고 주님과의 교통이 원만하다면 비록 그가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주의 위대한 일꾼들의 생애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생명력있는 자의 경건은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됨을 믿는다 당신에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딤후 3:5] 하늘의 사람, 땅의 사람 빌립보서3:17∼4:1
옛 애굽 테베 왕국의 오이디푸스에 얽힌 전설은 오늘의 혼돈과 방황, 그리고 불확실성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일대학의 헉슬러 교수는 이 시대를 혼돈의 시대라고 했고, 하바드대학의 갈브레이드 교수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의 시대는 모든 면에서 흔들리는 시대요,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루소는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고 했는데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두 종류의 인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땅의 사람입니다. 땅에서 태어나서 땅의 사람으로 사는 자가 있는 반면, 땅에서 태어나도 하늘의 사람으로 사는 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바울은 우리들이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북 침례교 신학교수인 볼쳐트는 본문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 말 것인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I. 땅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3:18-19)
먼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십자가의 원수"가 당시 어떤 자들을 지칭한 말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아마도 유대 율법주의자들이나 反도덕주의자들에 대한 언급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로워지고 이로써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십자가는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또한 스토익파의 자연주의자들이나 에피큐리안들인 향락주의자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도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십자가의 원수"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독교의 진리나 성경의 가르침은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일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고집과 교만, 체면과 외식을 내세우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이비 그리스도인들일 것입니다.
둘째, 저들의 마침은 멸망입니다. 여기서 "마침"이란 무엇을 위하여 예비 되었다란 뜻입니다. 결국 땅의 사람은 멸망을 위하여 예비된 자들이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저들의 신은 배(腹)입니다. 저들은 황금과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귀중하게 여깁니다. 마치 광야에서 황금 송아지에게 절하던 자들처럼 말입니다. 넷째, 저들에게 영광은 부끄럼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양심과 진리의 빛으로 볼 때 부끄럽고 창피한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저들은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입니다. 땅의 일이란 하늘의 일의 반대입니다. 이는 일시적이고 인간적이며, 이기적이고 반도덕적인 행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가치관과 인생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면 여전히 땅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II. 하늘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3:20-21)
첫째,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 시민권이란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품위를 지키는 행동이 포함된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구원자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마치 포위된 군인이 원군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기다리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셋째,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자들입니다. 낮은 몸이란 죄악 속에서 형편없게 된 비참한 지경을 말합니다. 반면 영광의 몸이란 부활하신 주님, 변화산의 주님처럼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북풍에 매어 달려 있는 잠자리의 유충과 같습니다. 비록 지금은 비참한 신세이나 그 날, 잠자리로 변하는 날에는 높은 창공을 날아다니며 자연을 마음껏 즐기게 될 것입니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주인공은 포로가 되어 비참한 삶을 겨우 살아갑니다. 그러다 우군의 구출작전이 성공하여 조국으로 돌아온 그가 이제는 미국의 특사로 월남에 보내집니다. 포로였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III. 그러므로 주안에 서라 (4:1) 바울은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쉽게 포기하거나 헐값에 팔아 넘기거나 쉽게 굴복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안에 신실하게 서서 믿음으로 굳게 서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회에서나 직장에서 참 믿음을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봉사할 때에도 때로는 속상하고, 때론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주저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나 장로, 집사나 권사같은 중 직자들도 그렇게 흔들리는데 평신도야 그 흔들림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쉽게 넘어지거나, 그리스도인 되기를 포기하거나, 믿음을 일시적 감정이나 불편에 팔아 넘겨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이처럼 여러분 모두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길을 가던 주님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순례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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