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스크랩] 일일예화말씀묵상 2011년 3월 16일 (수) - 그리스도의 용서

은이dii 2011. 4. 21. 16:45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W. 브레이크의 수채화 간음한 여자에서는, 여자를 고발하는 자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있다.

그녀는 땅바닥에 뭐라고 글을 쓰고 있는 예수와 마주 서 있으며, 이 예수에 의해 해방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그린 그림에서는 이 정경보다는, 여자를 끌어내어 예수에게 시비를 거는 율법사나 바리새파의 사람들을 그린 것이 많은 것 같다. 예수는 여기서 무엇을 썼을까?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모두가 무언가 썼다라는 기사는 이것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도 있다.

우리에게 자유로운 해석이 허용된다면, 주 예수의 손가락이 땅에 닿았다는 사실을 중시하려고 합니다.

죄많은 야곱 앞에 하늘에서 수직으로 사닥다리가 내려왔습니다

간음한 여자는 자기를 위해 죄없는 분이 몸을 굽혀 손가락을 땅에 대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무엇을 느꼈을까요?

하늘에서 오신 분이 땅에 몸을 굽힙니다. 그것도 드러난 내 죄 때문에

이 침묵의 한 때가, 정의를 내세워 남을 헐뜯는 인간에게나 자기 죄를 변명할 수 없는 인간에게도 뚜렷한 뭔가를 깨닫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신 분이시지만 드러난 인간의 죄 앞에서는 늘 침묵하셨다.

당신은 다른 이들의 잘못 앞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마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제 목 : 이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본 문 : 8:1-11

 

이 세상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는 범죄가 드러나 떨고 있는 여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여인을 정죄하고 돌을 던지기 위해서 모여든 구경꾼들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의 허물은 크게 보고 자기의 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남의 어려움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절대로 어렵지 않을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 때문에 더 슬프게 되고, 더 아프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는 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군중들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더욱 괴롭습니다.

 

율법의 의하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히면 남자와 여자를 같이 돌로 치게 되어 있습니다. 몰려든 군중들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일부러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살려 줄 것입니까? 죽일 것입니까?”

이 세상은 본문 말씀과 같이 끌려 나온 여인과 돌을 들고 이 여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만남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우는 자를 더 울게 하고, 아픈 자를 더 아프게 하고, 환난에 빠진 자를 더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누구도 생명의 길, 구원의 길, 복받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마을 아랫동네에 술집이 있었는데, 동네 청년들이 그곳에 술을 먹으러 갑니다. 매일 술과 함께 살았습니다. 지치도록 술을 마십니다. 밤이 새도록 먹고 토하고 또 마십니다. 많은 청년들이 술 때문에 병들었습니다. 술 때문에 폐인이 되었습니다. 술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래도 또 술을 먹고 술집에서는 또 팝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여보게, 오늘은 그만큼 먹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게, 술을 적당히 먹어야지 어떻게 취하도록 먹는가?” 하고 한마디라도 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술집 주인은 이제부터 매상을 올려야 된다고 계속 부어줍니다. 이때가 바로 돈 벌 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두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집니다. 이 잔인하고 살벌한 현장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이 여인 앞에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글을 쓰셨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글을 쓰셨는지 성경에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많은 학자들이 본문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주님께서 둘러선 사람들의 죄를 하나하나 다 쓰셨다는 것입니다. “너는 5년 전, 1217일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지 않았느냐? 정 목사, 너는 10년 전에 안 그랬냐? 이 집사 너도 캄캄한 밤에 어디에 가지 않았느냐?” 이렇게 계속 일일이 적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만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율법대로 하면 자기들도 모두 돌에 맞아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두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사람인데도 자기 자신은 모르고 남의 허물만 들추어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의 죄가 드러나게 되자 군중들은 다 돌아가고 여인만 혼자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의 일에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남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교만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누가 빠졌대? 빠진 위치가 어디래? 왜 빠졌대?” 하며 괌심을 가집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어 살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두 구경만 합니다. “어떻게 교통사고가 났느냐. 어디에 불이 났느냐. 누가 감옥에 들어갔느냐하면서 모두가 흥분합니다. 이야기 거리로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 비판을 받을 것이요 정죄하는 사람은 그 정죄를 받을 것이요. 남을 욕하는 사람은 대신 욕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물에 빠지 사람이 누구냐. 고향이 어디냐 출신 학교가 어디냐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빠졌는지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죽어가는 사람, 생명을 찾아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향해 뛰어들어 건지시는 분이 바로 주님인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과 역사의 모든 인물들과 다르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가 없습니다. 의인도 없습니다. 돌을 던질 자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교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오셨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영생을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일단 자기가 안전한 다음에 남을 건져냅니다. 자기가 실컷 먹고 난 다음에야 남에게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무덤으로 내려가시고 우리를 하나님 보좌로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옷이 다 찢어지고 벗겨져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대신 우리에게 새로운 세마포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에게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에게는 나음을 입혀 주셨습니다. “주 십자가에 달리사 날 구원해 주셨으며 주 예수님 고난 받아 나 평화 누리도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찬송가 468).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낮아지셨습니다. 버림받으셨습니다. 나의 구원은 주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고 주신 영광스러운 축복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귀한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월남 전에 참전했던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가장이 되는 젊은 남편이 월남전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술픈 가정에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남의 집 지하에 전세로 살다가 좋은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5, 7살 난 어린아이들이 항상 남의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이제 자기 집에도 텔레비전이 생겼습니다. 냉장고도 생겼습니다. 좋은 것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친구도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텔레비전이 누구로 말미암아 왔는지를 모릅니다. 아파트에 사는 기쁨이 누구로 말미암아 온 것인지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저 좋아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생이 되면 서서히, 그 배경을 알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를 위해 싸우시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혼자 우리를 기르시느라고 어라나 고생하셨을까?”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자기 책임이 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릴 때는 모르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평안하면 최고였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교회 나와서 은혜 받고 우리 가정이 잘되니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축복이 누구로 말미암아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대가로 주어진 이 영광을 우리는 소중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왠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찬송가 141).

 

여러분은 과일 하면 부사가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사는 세계 과일 품평회에서 18번째라고 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왜 부사가 수출이 안 되나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결코 우수한 품질의 과일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도 두 종류의 과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하신 과일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영원히 사는 생명의 과일입니다. 그 과일의 이름이 창세기 29절에 처음 나오고, 요한계시록 222절에 또 나옵니다.

또 하나는 먹으면 안되는 과일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됩니다.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먹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먹으면 망하는 과일, 독이 있는 과일이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그것을 따먹음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영적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육은 어떻게 됩니까? 선악을 아는 데,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데 도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라도 자기 몸에 좋고 안 좋은 것은 금방 아는데, 바로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렸던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문둥병 환자에게 손을 올려 만져주셨습니다.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마다 유대 인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당신이 안식일 날 그럴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도 구약의 율법대로 하면 마땅히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여인은 반드시 죽여야 된다고 생각했지 살려야 된다는 생각은 아무도 못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에 눈을 떴습니까? 선악을 아는 데만 눈을 떴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는 어디에 눈을 떴습니까? 우리 인간은 배우면 배울수록 비판만 할 뿐 영생은 모릅니다. 구원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모든 사람을 선과 악으로 보았습니다. 저 사람은 십일조 안하고, 저 사람은 주일을 잘 안 지키고, 저 사람은 가정생활 잘못하고, 저 사람은 직장 생활 잘못하고, 저 사람은 말이 신실하지 못하고, 저 사람은 남의 돈 떼먹었고, 이런 식으로 모든 삶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며 목회를 한 것입니다. 나의 삶은 항상 비판만 하고 항상 불평만 하고 항상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목회는 이런 목사는 한 생명도 살릴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살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 우리로 생명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5절에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47-48절에는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51절에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삶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양은 키가 작구나. 니 양은 성격이 못되었구나. 이 양은 털이 쓸 만하구나이렇게 분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길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살려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문둥병자는 사람들과 가까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셔서 문둥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율법, 선과 악으로 판단하는 율법을 떠나서 주님은 문둥병자를 치료하셔서 건강한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잘되려면 부부간에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을 떠나야 됩니다. 부부간에 따지면 그 가정은 끝납니다. “지금 시간이 몇 기인데 이제 들어옵니까?” 하고 따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결혼 초기를 못 넘기는 것은 따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선악을 따지고, 옳고 그른 것만 따진다면 여어분을 향하여 돌이 날아올 때가 멀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이 심판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은 어떤 일로 인하여 심판을 받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와 함께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십시오. 그러면 좋은 것을 받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사랑을 받습니다. 긍휼을 베푸십시오. 그러면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면 여러분도 똑같이 그런 일을 당할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우리나라 40년 동안의 근대사를 보면서, 남을 정죄하면 자기도 수의를 입고 고무신을 신고 재판정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쁜 놈들하면서 남을 궁지에 몰아놓고 정죄하던 사람이 결국 같은 신세가 되어 재판정에 서는 모습들을 보고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향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여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살리러 오신 분입니다. 오늘날 죄악이 관영한 이 땅에서, 돌을 들고 있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주님은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건지시기 위하여 오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