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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변화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리적 변화요, 다른 하나는 화학적 변화이다. 물리적 변화는 물에다 열을 가하면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올라간다. 그 수증기에다 냉기(저기압)가 가해지면 다시 물(비)이 되어 내려 떨어진다. 그 물을 섭씨 영도 이하로 차게 하면 냉동되어서 딱딱한 돌같은 고체가 된다. 같은 물인데 꽁꽁 얼어붙은 강 위로는 탱크가 지나가도 문제없는가 하면 그 얼음이 녹으면 강물이 되어 모든 물체가 강물에 빠져 가라앉는다. 이 물리적 변화의 특징은 언제든지 조건만 맞으면 원상태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러나 화학적 변화는 전혀 다르다. 가령 나무를 불로 태우면 나무는 온데 간데 없고 재만 남는다. 연기로 그 형체는 사라진다. 그 연기와 재를 가지고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원래 타기 전의 나무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기독교의 거듭남은 물리적 변화가 아니다. 화학적 변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완전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되살아나는 것이다. 성령의 맹렬한 불에 생태적 인간인 옛 사람은 완전히 타서 그 자취를 감추고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새 생명, 새 사람이 되어 다시 옛 사람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변화인 것이다. 즉, 깨지고 찌그러져 못쓰게 된 놋 그릇을 용광로에 넣어 녹여 쇳물이 되어서 예수님 형(form)에 부어 새 그릇이 되어 나오는 격이다
당신에게는 이런 화학적인 변화가 주어졌습니까?
[롬 6:4]
거듭남의 의미 에스겔서 36:24-28, 요한복음 3: 1-15
조선일보에 실린 일본 소니 사장 이데이 노부유키의 인터뷰 기사 가운데 "기업에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패러다임과 장(場)이 바뀌었는데도 과거의 성공체험에 안주해 과거 방식을 고수하면 결과는 실패일 뿐입니다. 그 동안의 성공경험을 완전히 포기하고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이런 대변혁기엔 과거식 구조를 해체하는 세력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해집니다. 나는 이들을 Rule Breaker(틀을 깨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거듭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업만이 거듭나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야말로 거듭나지 않으면 쓸모 없는 교회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교회야말로 '룰 브레이커' 즉 틀을 깨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틀과 경험과 의식에 안주해 있는 동안 변화하는 역사 앞에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낙오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기업보다 그 시대, 그 역사에 더욱 민감하여야 할 파수꾼이기에 시시각각 변하는 그 시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열린 의식,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역사 변화는 그 변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불과 1세기 동안 과학과 산업의 발전은 놀라운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는데, 지금은 더 빨리 더 많은 변화를 우리 앞에 예고하고 있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가진 역사에 대하여 우리가 잠시라도 방심하면 곧 우리는 그 대열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열에서의 낙오란 곧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한 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자라지 않으면 안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두는 일은 곧 죄악입니다. 결국 그는 어두운 바깥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듭남의 의미는 한 번만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천국에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고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만 경험하고 알뿐입니다. 따라서 이런 의식 이런 경험만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요한복음 3장 12절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땅의 변화도 미쳐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듭남이란 이 땅의 모든 사고 방식과 틀을 깨트리고 하늘의 일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고,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사건건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과 충돌하신 것은 근본적으로 그 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틀을 가지고 그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율법의 틀에 매인 유대인들과 충돌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에 대한 해석의 차이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중심의 시대가 끝났음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황당한 이야기여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십자가에 처형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틀을 깨신 '룰 브레이커'이셨습니다. 누구든지 부자가 되고자 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되라고 하셨고, 누구든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세상에서 서로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모두가 넓은 길로 가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으며, 모두가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목숨을 위해 사는데, 그 목숨을 버리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틀을 완전하게 깨신 분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룰 브레이커'가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 새로운 사고 방식, 열린 마음 없이는 이런 예수님의 새로운 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천국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의식의 성격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욱 분명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영,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영,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마음이란 거듭나기 이전의 생각이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거듭나기 이전에 우리의 생각은 주로 자기 중심적이었고, 그 마음은 대체로 다른 세계, 다른 사람에 대하여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그가 지으신 세계와 사람에 대하여 닫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생각이나 마음이 항상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고 한 번 경험하고 붙잡은 것은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존재로 그 생각이나 의식이 제한되어 있고 주로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을 생각할 줄 모르며, 더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그를 바라보거나 그에게 기도하지 않기에 그의 생각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함을 뜻하며 따라서 그 변화를 따르기보다는 현재에 만족하며 안주하려는 경향이 뚜렷한 것입니다.
이런 것과 달리 새 마음, 새 생각, 새 영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옛것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므로 그가 이루시는 일과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가 지으신 세계와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의 폭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뜻을 헤아리고자 하기에 그 역사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기 위하여 항상 열린 마음으로 그가 이루시는 새로운 일들에 대하여 받아드리고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은 대단히 유연하여 한 틀에 매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과 같아서 좁은 곳을 통과할 때는 소용돌이쳐 흐르고, 넓은 곳에 이르러서는 유유히 흐르며, 바다에 이르러서는 바다처럼 폭을 넓혀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일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넓고 깊어서 우리에게는 항상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는 나라이기에 우리가 쉬지 아니하고 그 나라를 탐험하여도 늘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영도 날마다 성령으로부터 새롭게 하심을 받지 않고서는 계속 자랄 수가 없습니다. 계속 새롭게 하시는 성령 안에 내가 있을 때 내 안에 들어온 새로운 영이 자라게 되며, 살아있는 영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새로운 영은 그 자체로는 새로운 것으로 남아 있지를 못합니다. 마치 전기와 같아서 발전소로부터 공급되는 전깃줄에 전등이 달려 있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안에 들어온 새 영이 성령과 연결되어 그가 공급하시는 하늘의 능력으로 채워질 때만 그 영이 자라며 그 영의 능력이 더욱 확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계속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호롱불을 켜던 집에 전기를 가설하여 불을 밝히는 것은 거듭남에 비유할 수 있는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나 계속 전력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그런 변화는 순간적인 기쁨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계속 전력이 공급될 때 비로소 그 변화가 실감 있게 우리의 삶에 다가올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어둠을 밝히는 전등에 만족하였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라디오도 듣게 되고, 전기 다리미도 쓰게 되며, 선풍기를 사다 놓고 틀게 되고, 좀더 지나니까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냉장고가 생겼으며, 온갖 전기 제품들이 밀물처럼 우리 가정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과 우리가 한 번 연결되면, 우리의 죄사함을 받는 일에 그치지 않고, 우리 생활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사랑과 소망이 생겨나며,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 절제와 인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 세계를 알게 되듯이 성령이 보내시는 뉴스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보를 얻게 되면서 우리 속에 새로운 의식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와 정치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문화를 보는 눈이 다양해지고, 역사의식이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와 다른 눈으로 피조세계를 보게 되며, 그래서 환경 보전의 필요성을 알고 그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저녁이면 불을 밝히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새로운 정보, 새로운 기쁨을 얻는 것처럼, 매일 성령이 보내시는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며, 성경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제와 다른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면서 생각을 고쳐먹게 되고, 그가 보내시는 위로와 소망을 통해 기쁨과 용기를 얻게 되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신앙의 삶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새로운 영은 텔레비전과 같습니다. 방송국에서 보내오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얼마든지 받아보게 하는 것처럼 우리 속에 들어온 영도 성령께서 보내시는 새로운 정보들을 계속 받아보면서 우리의 삶을 늘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
이렇게 우리는 늘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정보들을 받을 수 있는 영을 받았으면서도 마치 텔레비전을 갖다 놓고도 켜지 않는 것처럼, 날마다 기도하지 않고, 날마다 성경을 보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보내시는 새로운 정보들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옛날에 보았던 명화 한편 기억하고 아무리 새로운 영화가 나와도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면서 영화 하면 옛날에 한 번 본 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한 번 은혜 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데 옛것에만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결국은 낙오자가 되거나 보수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영을 받은 지도자와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늘 새롭게 변화를 이룩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들은 항상 되풀이되는 고루하고 새로울 것이 하나 없는 그런 일들만 하면서 결국은 쓸모 없는 교회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또 다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새 시대의 새로운 일군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담당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 우리 교회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롭게 그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였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를 맞이할 때 새로운 선교 전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거듭난 영을 가지고 날마다 위로부터 오시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계십니까? 이 역사의 변화를 예민하게 읽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지난날의 틀 속에 안주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 주신 달란트는 지금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속에 묻혀 있습니까?
새로운 영으로 거듭난 일군을 필요로 합니다. 새로운 마음을 갖고 역사를 볼 줄 아는 새로운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이룬 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군을 필요로 합니다.
이제 깨어 일어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새로운 정보를 따라 자신을 새롭게 하십시오. 사고방식을 바꾸십시오. 마음 문을 활짝 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넓은 세계를 호흡하게 될 것이며, 그가 이루시는 역사를 알게 될 것이며, 새로운 정보를 통하여 새 역사에 동참하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새 역사 창조에 거듭남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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