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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을 종합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 "성례"이다. 예수는 신비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여려 곳에서 하셨다. 자신의 살을 먹어야 하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그래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의 육체가 먹고 마셔야 생명을 유지할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도 그리스도와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여 그 말씀을 받아야만 내 생명은 살 수 있다. 그것이 영생이고 약속된 선물이다. 나의 공로와 고행으로는 얻을 수 없다. 순종과 충성으로만 받을 수 있다. 영생을 얻는자는 따라야 할 윤리적 행위가 있다. 좁은 길로 가야 한다. 그 길은 고독한 길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좁은 길을걸어야 한다. 오늘의 생을 영원한 생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성경은 죽음을 통한 영생을 말하고 있지만 영생의 시작은 오늘을 살고 있는 현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부터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지금부터가 영생적 삶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오늘의 생, 그것이 영생으로 발전된다. 죄와 사망을 이기는 생활, 그리스도에 충성하는 생활, 그 자체가 영생이다.
[요 14:20]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걸어가자. 롬 3:23-24
지난번 News week지에 잠깐 보니까 어떤 기독교의 집단에서는 이상한 방법으로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한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8절에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 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독사를 잡아보도록 해서 아무 일이 없는 사람만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성경에 근거를 두기는 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름니다. 이것은 신앙 같지만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것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예컨대, 방언을 해야 참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든지, 기독교 의 신앙은 귀신을 쫓아내기 위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말하기는 하나, 성경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도시나 관광지에 가면, 그곳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손님들이 오면 그곳으로 안내를 합니다. 우리도 믿음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성경전체를 조명해 줄 수 있는 정상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산 頂上과 같은 사건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덴동산의 이야기고, 둘째는 출애굽의 시건이고, 셋째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 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잃어버린 것이 몇 가지 있 습니다. 영의 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악에 눈이 떠졌습니다.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특히 생명나무를 과실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 광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 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영광을 잃어버렸다는 말이고, 그 영광을 다시 찾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이전에 큰 충격을 준 김성복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우수한 학교를 다 다닌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 가서, 아주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된 사람입니다. 그 런데 돈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청계천에서 칼과 옷을 사서 입고 복면을 하고 자기 아버지 방에 들어갔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눈을 보는 것이 두려 워 자기 아버지의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칼로 아버지를 찔러 살해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의 전수자요 아들은 그 생명을 이어받은 자입니다. 부자간의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끊을 수 없을 뿐 아 니라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이런 아버지를 돈 때문에 죽였습니다. 돈에 미치면, 자기 이익에 눈이 어두우면 사람이 그렇게 됩니다. 이 사건을 놓고 한국사회가 들끓고 있습니다. 작년에 유산 때문에 한의사인 아버지를 죽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충격적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런 잘못된 정신 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풍토가 고쳐지지 않은 한 이후에도 이런 비극을 계속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돈 앞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살해당한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내가 그처럼 사랑하며 기른 자식에게서 살해당하다니, 이보다 더 비극적 인 일이 이 땅에 있을까요? 아버지와 바른 관계로 살아가면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인데, 아버지보다 아버지가 가진 물질에 욕심을 가지니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한 가지 느낄 수 있는 것은 부자의 관계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는 잘못된 정신은 우리 그리스 찬들 머리속에까지 들어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신앙인들 중에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더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귀한 분이라고 해도 나에게 당장 무엇을 주시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언제든지 내 팽개칠 수 있다는 의식이 마음 속 깊이 들어 있습니다. 내 유익을 위해서는 진리도, 하나님도 버릴 수 있다는 논리가 우 리 그리스도인들 마음속에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귀한 것이 아니라, 내 사정이 더 급하고, 물질이 더 귀하 고, 내 건강이 더 귀하고, 성공 이 귀하고, 내 평안이 더 귀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속에 이런 정신이 흐르고 있다면 우리도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 못지않습니다.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이 잘못 되어 있지 않는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것을 엄히 경계하였습니다. 디모데야 이 세대에 부한 자들에게 명령해라. 마음을 높이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 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점 6:17-19)
처음 물음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우리 그리스찬들이 믿음 안에서 가장 힘써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갱신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 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2:12:"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 전서 1:7절에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 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 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무엇일까? 바울 사도가 이 말을 할 때 무엇을 생 각하며 말했을 것인데, 과연 그 것을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바울의 다메섹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영원하신 실체를 입으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광의 세계에 계신 주님이 바울 자신을 그 안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림자도 없으시고, 죽음도 없고,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시며,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우리를 감싸시는 하나님의 영광, 감옥 안에도 찾아오시고, 풍랑 중에도 찾아오시고, 두려울 때마다 찾아오신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그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에 감사 감격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주님 안에서 그것을 늘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 지극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라는 것 입니다. 성경대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삶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서 일생동안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영광의 길이 열렸습니까? 이 영광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바울 사도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오래 오래 참으시고 , 주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음으로 우리의 지난 과거의 죄를 간과하시므로 우리에게 의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나대신 양이나 소나 비둘기 한 마리가 반드시 죽어야 했습니 다. 다른 피를 내 생명대신 드리고 나서야 내가 용서를 받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 나 대신 자 기 피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내 죄의 벌을 취소하신 것입니다. 관과하다는 말로 쓰여진 paresin이란 단어는 pariemi(파리에에미)란 단어에서 나왔는데, 이 파리에에미란 단어는 가게하다, 완화하다는 뜻으로 써 결국 파레신이란 단어는 그 죄를 없는 것으로 지워버렸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우리는 아무 한일 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 해 주셨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그를 대했던 탕자의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버지 도 의롭게 되고 아들도 의롭게 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아들을 심문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아들의 옷을 입혀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도장을 끼워주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아들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품꾼으로 삼아주십시오"하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의인처럼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아버지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옛날에 시골에서 보면 "야 이놈아 너 죽고 나 죽자고" 자식을 떼리는 아버지가 있었 습니다. 아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 겁니까? 따라서 아버지가 얼마나 비참해지는 겁니까? 아들도 망하고 아버지도 망하게 되었 으니 이보다 더 비참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어느 싸움 잘하는 수도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흘룽한 수도원장이 가도 이들을 다스릴 수 가 없었습니다. 감독이 다시 한 수도원장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나이가 좀 들고 허스름한 수도사가 오니 이들은 이 늙은 수도사를 식당으로 보내어서 밥을 짓 게 만들고, 설거지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호되게 욕설도 하고 모욕도 주고, 고생도 말할 수 없이 시켰습니다. 3개월 후에 그 지 역의 감독이 수도원장이 잘하고 있는가 해서 그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수도사들은 놀라서 엎드려 감독을 영접했습니다. 감독이 물었습니다. "너희들 원장님은 어디 계시냐?" "아직 원장님은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수도사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뭐라고, 3개월 전에 분명히 내가 이곳에 원장님을 보내었는데, 부임하지 않았다니 그 게 무슨 말인고?" 수도사들을 그 즉시 부엌으로 달려가 부엌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원장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후로 이 수도원이 모범 수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도원장도 의롭게 되고 수도생들도 의롭게 되었 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 가 어디 있느뇨. 있을 수 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6,27)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살도록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몸이 건강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일이 잘되고 안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평화가 있습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충만한 은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급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갱신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묻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율법을 폐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워주는 것입니다. 왜요?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서 영광으로 점점 나아가기 때문 입니다. 오늘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해보고, 잘못된 관계가 있으면 그 관계를 갱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영광스러움을 안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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