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칼슨이라고 하는 의료 선교사는 아프리카의 콩고에 가서 수 많은 주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면서 하루에도 많은 이들을 치료해 해주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칼슨 박사님, 당신은 피곤하지도 않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생활하기 때문에 피곤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매 순간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전하며 의료봉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반란군에게 피살되어 순교 하였고, 그의 주머니 속에서는 포켓용 성경이 발견되었는데
그 첫 장에는 "평화"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더라는 것이다.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더위와 빈곤과 질병과 맞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우던 선한 목자가 되심을 믿고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당신의 삶의 잔은 어떠한가? 넘치는가? 모자라는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도록 하자.

우리는 오지에서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일만으로도 주안에서 귀한 희생과 헌신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 땅에 뭍혀 썩어지는 한알의 밀알과 같이 죽어지기를 원하신다.
[요 12:24-25]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1. '주님의시선' 카페와 카페지기가 섬기는 '마산시민교회'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위치
성경:요12:24-33
<서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이후에 오늘 본문의 말씀같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한다'는 말씀으로 연결하고 계십니다.
예수를 믿는 문제에 있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모르는 부분이 더 많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신자들이 신앙 생활의 핵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핵심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핵심을 핵심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은듯 싶습니다. 다시말해 이미 자기가 소유하고 알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어디서 잘못되어져서 그러한가?
하는 점들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해하게 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봉사를 하는 데 돈이 있는 쪽과 없는 쪽 중에서둘다 똑같은 신앙이라면 어느 쪽이 봉사를 더 많이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돈이 있는 쪽이 봉사를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같은 신앙이라도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이익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실수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인 것입니다.
'없는 신앙을 돈으로 떼워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고수하면서도, 똑같은 바에야 있는 편이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건강한 쪽과 병든 쪽중에, 어느 쪽이 복음 전파에 이익이었습니까? 뜻밖에 병든 쪽이 이익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기왕에 동일한복음의 열심을 가지고 있을 바에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열심을 다 활용할 수 있는 건강과 조건을 주신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습니다.'하면서 3번씩이나 건강을위하여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같은 생각이 틀렸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우리가 가장 잘 틀리는 상식이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세상적인 것에다가 기독교적인 개념만을 끌어와서입히고 있는지 모릅니다.
동일한 열심을 갖고 있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봉사를 많이 할 것 같으냐?고 물으면 우리는 으례히'부자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똑똑한 자와 똑똑하지 않는 자 중에서 어느쪽이 하나님을 위해서 더 할 일이 있을 것이냐?
물으면, '똑똑한 자'라고 우리는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잘못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똑똑한 자를 쓰지 않는다고 여러 번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라도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을 쓰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것이 기초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쓰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미워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교육은 선생님이 훌륭해서 잘 가르치는 반보다 선생님이 사랑을 갖고 학생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한 반이 잘 되도록 되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 재정은 주판을 잘 놓고 계산을 잘 하는 사람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기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교회 일는 몇 사람이 돈을 내서 일이 되게 하는 것보다 모든 교인이 그 일을 위해 기도하고 한마음이 되어서 그 일을 완성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합니다.
만약에 교회 일이 몇몇 사람에 의해서 행하여진다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일에서 제외되고 말것입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본 것이 아니라 돈 있는 사람이 돈을 내는 것을 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일 만큼 기적을 요구되는 곳도 없습니다.
도무지 못 할 것 같고 안 될 것 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일이 내 손에 쥔 것이나 내가알고 있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가장 큰 병이 무엇입니까?
내가 알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범주 속에 것을 훨신 더 신뢰하는 병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일마저도 늘 내 손과 내 능력과내 이해의 범주로 끌어내려서 처리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식을 벗어던지며, 가장 간단한 생각조차 하지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상식의 범주를 넘는 것임을 이해하고 계셔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빌3:9절을 보십시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울 사도가 갖고 있는 생각 중에 놀라운 생각은 이것입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든지, 이스라엘 민족이라거나, 베냐민 지파와 바리새인이라는 것 때문에 생겨난 의가 아니라,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단절되고 동떨어진 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율법을 등장시켜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율법은 기준이나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적 법칙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의'가 나의 경험과 지식과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내게 해가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받은 '의'입니까? 믿음으로 받은 '의'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하셔야 됩니다.'하고 이야기 하면, 요즘 교인들은 참 약아서 앞에서는 다 그럴 듯한 감동스런 얼굴을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딱 돌아서기만 하면 마음에 이미 판정을 내립니다. '목사님 목사님이나 그렇게 사십시오. 제가 그래서 목사님을 좋아하고 목사님 교회에 나갑니다. 그러나 목사님 말대로 산다면 사흘도 못 가서 굶어 죽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것이 어느 것에 해가 된단 말입니까?
성경은 우리와 달리 현실 생활이 해가 된다고 판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게 판정을 내린다고요?
현실 생활이 더 주가 되어 있으므로 신앙생활이 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힘든 신앙생활은 목사님께서 좀 대표로 살아 주시고 우리는 여기서 현실을 인정하면서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80% 쯤은 현실에다 발을 디디고 있고, 20%만 신앙에다 발을 낳고 있을 뿐입니다.
왜? 20%는 그래도 넣고 있을까요? 죽으면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 심각해지니까 천국은 가야겠고 그래서 예금 20%를 해 놓고 현실 80%는 여기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싸워야 하는 신앙생활이 현실 생활에 해가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꺼꾸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 생활에 훨씬 더 큰 목적을 두고 있고,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신앙생활을 살지 않기로 결심하고 대강대강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똑똑한 것입니까?
두려운 일입니다. 빌3:10-11절을 보시면 좀 더 진전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니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뭐라고 말씀합니까? 신앙생활의 진전과 성숙은 오직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무엇에 대한 죽음입니까?
내가 갖고 있던 세상 법칙, 세상에 목적을 둔 것,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능력 등 내 것에 관한 모든 것을 죽인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모든 것을 죽인 거기서부터 어린아이로서 새로운 출생을 하며 새로운 출발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우리는 무엇을 버릴 수 없다고 우기고 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이것들을 못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무지 뭐가 되지를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부활에 이르는 자리에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음을 본받아 죽은 자리에까지 도달해야 되는데, 언제나 이 자리에 가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만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 그렇게 하다가는 사흘도 못간다. 네 친구들이 너를 뭐라고 그러겠느냐? 너 그렇게 하고서도 어떻게 만수무강하갰느냐?' 하면서 시시 때때로 복병이 달겨 듭니다. 바로 이 복병 앞에서 무력화 되어버린 신자들 때문에 교회는 대강 살자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저도 목사님을 알아서 대접해 드릴 테니까 목사님도 그저 성경에 있는 좋은 소리로 저를 위안해 주십시오'
이렇게 서로 연봉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면에서 다 악당들입니다. 고쳐야 됩니다.
이것이 물론 하루 아침에 고쳐질 것이라고 쉽게 믿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어려운 그 말을 안하게 되었고, 그 말을 안 듣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들을 것을 들으셔야 됩니다. 분명히 내가 잘못했다는 확인을 가지고 가셔야 됩니다.
아마 각자가 알아서 돌이킬 날이 있을 것입니다. 맞아서 돌이키든지, 말씀을 따라 돌이키든지, 기도하다 어느 날 정말 기적 속에서 돌이키든지 하시든지 어째든 현재의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시면 안되고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라고 말도 안하는 풍토가 되어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대강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들에게 편한 사람을 부르고, 편한 사람의 말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 다수의 힘으로 정당하게 사는 사람을 밀어내어 버린 교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심각한 병입니다. 고치셔야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통과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새삼스레 새사람이 되라든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택과 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새사람이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사람들과 똑같이 가서 같이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드디어 여기에 대한 아픔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된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허락하시며, 우리에게 권면하신 것으로 쌓아 놓은 것이 무엇이냐를 자꾸 점검하셔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자신은 죽어버렸어야 되고 파묻혔어야 하는데
내가 살아서 돌아 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알아서 다 해버리니까
하나님께 일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내가 가진 고민보따리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끼지 못하고 내가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신앙이 10년을 믿었든 20년을 믿었든 밤낮 제자리인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한알의 밀알이 되신 것처럼 우리에게 밀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신앙생활은 내가 앞장서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양으로서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서 목자를 따라 갈 때 푸른 초장과 쉬만한 물가로 갈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횔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내자신 그대로 있으면 결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하나님 맞습니다. 원래 내것이 있습니까?
지금 내가 가진 것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이 모든 것이 어찌 내게 있을 수 있습니까?
나의가족, 나의 건강, 나의생명 , 나의 지식,
내게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아래 자신을 완전히 묻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내가 십자가 앞에 나를 묻을 때 나를 통하여 많은 열매가 맺힘을 꼭 믿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