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엡4:1-14절, 210.213.214장.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큰 과제는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가 되려는 아픔과 고통이 오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이 하나되는 것, 노사가 하나되는 것,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하나가 되는 것, 통치자와 국민이 하나 되는 것, 스승과 제자가 하나되는 것,
그리고 부부가 하나되는 것, 그리고 교회가 하나되는 것 등은 실로 우리 시대의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가 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억지로 하나로 봉합함으로써 되어질 일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하나가 되는 방법을 두고 투쟁과 논쟁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의 과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열, 반목질시하며 표류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상황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1.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 바탕입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기계나 물건이 아니고 인격이라는데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은 정치적인 묘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되는 것은 법적인 해결로 되어질 일이 아닙니다.
하나가 되어지는 일은 정책을 결정하거나 협상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오늘의 문제는 바로 인간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는 바로 인간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갖는가에 따라서 인간은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남북 통일이 어려운 것도 결국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노사문제도 서로 다른 마음을 갖기 때문입니다. 종교(宗敎)도 겉껍데기가 중요(重要)한 것이 아니고, 종교의 좌소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가령 남녀가 결혼할 수있는 최초의 조건은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마음이 하나가 될 때 부부가 되고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는 조건으로서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는 것이 있어야 하나가 됩니다. 물론 이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의 의미는 흔히 이 세상에 말하는 것처럼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만을 가진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는 정직한 태도입니다.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아는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겸손하게 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심정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상태를 향해서 개방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겸손의 태도를 가질 때 대화의 창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과의 감정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세계는 대화의 창문이 완전히 닫혀버린 느낌입니다. 남과 북이 대화의 창문이 닫히고, 정부와 국민이 서로 불신하게 되고, 노사간에 갈등,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반목질시,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와의 대화의 단절 등이 모두가 마음의 창을 닫아버린데 원인이 있습니다. 이 창문을 이제 열어야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주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화목케 하시는 일을 믿을 때 겸손하게 됩니다.
겸손은 우리 시대의 아픔을 치료하는 길이 됩니다. 사실 교만하게 되는 이유가 인간이 하나님께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겸손만 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이웃을 만나게 될줄 믿습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사실 온유란 말의 의미는 참으로 나약해 보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실제로 현대 사회에는 너무나 소극적인 삶의 태도인듯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매우 사나운 사대입니다. 걸핏하면 집어던지고, 걸핏하면 칼부림을 하고 사람을 죽이기를 예사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마음 쓰임세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날은 고요하게 속삭이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우습게 여겨 따돌림을 받고 비록 자기가 잘못했더라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도 지독하게 과격합니다. 말을 해도 섬짓한 말을 해야 말한 것 같고, 꼭 돌멩이를 던지고,
화염병으로 불지르고 최루탄으로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유리창을 깨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 우리 민족의 성격이 이렇게 비뚤어졌는지 정말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現狀)을 가리켜서 어떤 사람은 정치(政治)가 잘못되서 그렇다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경제(經濟)가 잘못되어서 부의 분배(分配)가 고르지 못해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교육의 잘못에다가 돌립니다. 물론 그런 사회적 요소가 없다고는 할 수없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인간의 죄악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투쟁적인 마음, 증오의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봄눈 녹듯이 녹여 주고 멀어졌던 사람을 가깝게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민중의 한"을 말합니다만 한을 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민중혁명을 선전하는 사람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을 일깨워 주어서 그것을 복수케 하고 뒤집어 엎도록 합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혁명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친 하나되게 하는 길은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마음은 갖기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명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절)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이시지만 죄인들처럼 겸손히 낮아지셨습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만나게 하시고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는 죄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도 어린양처럼 온유하게 참으시고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겸손하기도 어렵고 온유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사랑이 그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되게 하는 마음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고난과 시련이 와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배신해도 그것때문에 자기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참지 못합니다. 기다릴 줄 모릅니다.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자기가 역사의 주체가 되고 심판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즉각 즉각 자기가 심판을 내립니다.
그러나 사실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볼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래 참는 이유는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심판주가 되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심판하지 아니하고 참된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조급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가 만일 우리처럼 조급하시다면 우리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오래 참으사 택한 백성들이 회개하여 주 앞에 돌아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마음 바탕이 있을 때만 하나가 되는 삶이 이루어지고, 하나가 되는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2.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실 사랑은 인간의 마음의 기본적인 바탕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겸손도 온유도 오래참음도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개방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는 물질은 풍성해져 가고 있으나 사랑은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메말랐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 소리가 크게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단절이 생기고 계층간의 단절이 생긴 것입니다. 물질이 고루 분배가 되기만 하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회의 병패가 결국 불공평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공평의 원인이 결국 인간의 욕망과 비정 때문에 기인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사랑과 겸손을 삶 가운데,
실천하는 길만이 오늘 모든 단절의 아픔을 해결해 나가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도 사랑이 메마르면 이 세상의 공동체와 무엇이 다를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 본문에서 이렇게 하나가 되게 하는 비결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따져보면 에베소교회도 분열과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일세기의, 사람이나 21세기의 사람이나 다를바도 없고, 문제도 꼭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도 꼭 같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줍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승리를 보여 주신 것처럼,
분열과 대결의 장에 서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승리만이 오늘의 해결의 열쇠가 될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되게 하는 일은 단순히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런 분열과 아픔이 없어야 겠지요.
성경은 우리 본문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력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악한 것을 좋아하고 죄가 좋아하는대로 교만, 분노, 질투를 밥먹듯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성령 안에서 녹아지고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해야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삶이어야 하고 성령 안에서의 삶이어야 합니다.
다툼은 갈라서게 하나 평안은 하나되게 합니다. 증오는 헤어지게 하나 사랑은 더욱 가까이 합니다. 교만은 너와 나 사이에 경계를 그어 주나, 겸손은 너와 나 사이에 담을 헐어버립니다. 우리가 왜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까? 그 이유는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 있습니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입니다.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치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 한분이시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소망(素望)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眞理)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외에 방법(方法)으로 하나 되려는 노력(努力)은 도리어 더 큰 대결(對決)과 혼란(混亂)과 아픔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오늘의 교회는 갈기 갈기 찢어졌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는 모든 공동체마다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갈등, 빈부, 노사, 사제간, 정치, 종교, 사회(社會), 문화(文化) 어떤 분야에서든 병들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형제들에게 제시한 하나되는 삶의 원리는 우리들의 삶 속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줄 믿습니다. 하나가 되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처럼 서로를 신뢰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갑시다.
역사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줄 알고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 겸손과 온유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해서 교회도 하나되고 모든 계층이 하나되고 궁극적으로 남북이 하나되고 세계가 복음(福音)으로 하나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엡4:1-14절, 210.213.214장.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큰 과제는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가 되려는 아픔과 고통이 오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이 하나되는 것, 노사가 하나되는 것,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하나가 되는 것, 통치자와 국민이 하나 되는 것, 스승과 제자가 하나되는 것,
그리고 부부가 하나되는 것, 그리고 교회가 하나되는 것 등은 실로 우리 시대의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가 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억지로 하나로 봉합함으로써 되어질 일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하나가 되는 방법을 두고 투쟁과 논쟁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의 과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열, 반목질시하며 표류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상황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1.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 바탕입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기계나 물건이 아니고 인격이라는데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은 정치적인 묘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되는 것은 법적인 해결로 되어질 일이 아닙니다.
하나가 되어지는 일은 정책을 결정하거나 협상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오늘의 문제는 바로 인간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는 바로 인간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갖는가에 따라서 인간은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남북 통일이 어려운 것도 결국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노사문제도 서로 다른 마음을 갖기 때문입니다. 종교(宗敎)도 겉껍데기가 중요(重要)한 것이 아니고, 종교의 좌소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가령 남녀가 결혼할 수있는 최초의 조건은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마음이 하나가 될 때 부부가 되고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는 조건으로서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는 것이 있어야 하나가 됩니다. 물론 이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의 의미는 흔히 이 세상에 말하는 것처럼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만을 가진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는 정직한 태도입니다.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아는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겸손하게 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심정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상태를 향해서 개방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겸손의 태도를 가질 때 대화의 창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과의 감정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세계는 대화의 창문이 완전히 닫혀버린 느낌입니다. 남과 북이 대화의 창문이 닫히고, 정부와 국민이 서로 불신하게 되고, 노사간에 갈등,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반목질시,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와의 대화의 단절 등이 모두가 마음의 창을 닫아버린데 원인이 있습니다. 이 창문을 이제 열어야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주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화목케 하시는 일을 믿을 때 겸손하게 됩니다.
겸손은 우리 시대의 아픔을 치료하는 길이 됩니다. 사실 교만하게 되는 이유가 인간이 하나님께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겸손만 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이웃을 만나게 될줄 믿습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사실 온유란 말의 의미는 참으로 나약해 보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실제로 현대 사회에는 너무나 소극적인 삶의 태도인듯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매우 사나운 사대입니다. 걸핏하면 집어던지고, 걸핏하면 칼부림을 하고 사람을 죽이기를 예사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마음 쓰임세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날은 고요하게 속삭이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우습게 여겨 따돌림을 받고 비록 자기가 잘못했더라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도 지독하게 과격합니다. 말을 해도 섬짓한 말을 해야 말한 것 같고, 꼭 돌멩이를 던지고,
화염병으로 불지르고 최루탄으로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유리창을 깨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 우리 민족의 성격이 이렇게 비뚤어졌는지 정말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現狀)을 가리켜서 어떤 사람은 정치(政治)가 잘못되서 그렇다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경제(經濟)가 잘못되어서 부의 분배(分配)가 고르지 못해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교육의 잘못에다가 돌립니다. 물론 그런 사회적 요소가 없다고는 할 수없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인간의 죄악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투쟁적인 마음, 증오의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봄눈 녹듯이 녹여 주고 멀어졌던 사람을 가깝게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민중의 한"을 말합니다만 한을 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민중혁명을 선전하는 사람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을 일깨워 주어서 그것을 복수케 하고 뒤집어 엎도록 합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혁명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친 하나되게 하는 길은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마음은 갖기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명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절)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이시지만 죄인들처럼 겸손히 낮아지셨습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만나게 하시고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는 죄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도 어린양처럼 온유하게 참으시고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겸손하기도 어렵고 온유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사랑이 그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되게 하는 마음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고난과 시련이 와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배신해도 그것때문에 자기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참지 못합니다. 기다릴 줄 모릅니다.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자기가 역사의 주체가 되고 심판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즉각 즉각 자기가 심판을 내립니다.
그러나 사실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볼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래 참는 이유는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심판주가 되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심판하지 아니하고 참된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조급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가 만일 우리처럼 조급하시다면 우리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오래 참으사 택한 백성들이 회개하여 주 앞에 돌아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마음 바탕이 있을 때만 하나가 되는 삶이 이루어지고, 하나가 되는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2.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실 사랑은 인간의 마음의 기본적인 바탕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겸손도 온유도 오래참음도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개방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는 물질은 풍성해져 가고 있으나 사랑은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메말랐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 소리가 크게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단절이 생기고 계층간의 단절이 생긴 것입니다. 물질이 고루 분배가 되기만 하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회의 병패가 결국 불공평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공평의 원인이 결국 인간의 욕망과 비정 때문에 기인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사랑과 겸손을 삶 가운데,
실천하는 길만이 오늘 모든 단절의 아픔을 해결해 나가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도 사랑이 메마르면 이 세상의 공동체와 무엇이 다를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 본문에서 이렇게 하나가 되게 하는 비결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따져보면 에베소교회도 분열과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일세기의, 사람이나 21세기의 사람이나 다를바도 없고, 문제도 꼭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도 꼭 같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줍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승리를 보여 주신 것처럼,
분열과 대결의 장에 서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승리만이 오늘의 해결의 열쇠가 될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되게 하는 일은 단순히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런 분열과 아픔이 없어야 겠지요.
성경은 우리 본문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력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악한 것을 좋아하고 죄가 좋아하는대로 교만, 분노, 질투를 밥먹듯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성령 안에서 녹아지고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해야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삶이어야 하고 성령 안에서의 삶이어야 합니다.
다툼은 갈라서게 하나 평안은 하나되게 합니다. 증오는 헤어지게 하나 사랑은 더욱 가까이 합니다. 교만은 너와 나 사이에 경계를 그어 주나, 겸손은 너와 나 사이에 담을 헐어버립니다. 우리가 왜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까? 그 이유는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 있습니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입니다.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치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 한분이시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소망(素望)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眞理)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외에 방법(方法)으로 하나 되려는 노력(努力)은 도리어 더 큰 대결(對決)과 혼란(混亂)과 아픔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오늘의 교회는 갈기 갈기 찢어졌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는 모든 공동체마다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갈등, 빈부, 노사, 사제간, 정치, 종교, 사회(社會), 문화(文化) 어떤 분야에서든 병들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형제들에게 제시한 하나되는 삶의 원리는 우리들의 삶 속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줄 믿습니다. 하나가 되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처럼 서로를 신뢰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갑시다.
역사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줄 알고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 겸손과 온유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해서 교회도 하나되고 모든 계층이 하나되고 궁극적으로 남북이 하나되고 세계가 복음(福音)으로 하나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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