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스크랩] 옛날에

은이dii 2012. 1. 9. 11:34

 

 

 

우암 송시열이 언젠가 주막에 들렀을 때였다.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문 밖이 요란하더니 어떤 무관 한 사람이 갑자기 주막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좁은 주막에서 두 사람이 한 방에 자리를 잡게 됐지만, 아무래도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큰비가 분명했다. 두 사람 모두 한참 동안 무료하게 앉아 있던 중에 무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울 보아하니 꽤 듬직해 보이는군, 그래 어디 심심한데 장기나 한 판 놓아 보시겠나?"

"예, 그러십시다요."

우암 송시열은 우선 말씨부터 공손하게 건넸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장기 한판을 다 두었을 때 무관이 또 다시 말을 꺼냈다.

"참, 영감이 감투를 쓴 걸 보니 무슨 벼슬을 한 모양이구만? 보리 섬깨나 없앴겠네 그려, 보리동지라도 했는가? 하기야 이런 궁벽한 산촌에선 보리동지도 과분하지...."

촌놈들이 보리쌀을 팔아 첩지 한 장 받고는 양반행세를 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암은 속으로 우습기 짝이 없었으나 시치미를 뚝 떼면서 아주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 예, 뭐, 벼슬이라고 해봐야 대수로울 게 있습니까?"

너무나 우렁찬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관은 속으로 다소 놀랐지만 짐짓 더 얕잡아보는 투로 물었다.

"그래, 성명은 무어라 하는고?"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예, 제 성은 송가이옵고, 이름은 때 시(時)자, 매울 열(烈)자, 송시열이라 하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무관의 안색은 이미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송~시~열!?"

일국의 정승이요 대문장가일 뿐만 아니라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나라 일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좌의정 우암 송시열 대감! 그에 비하면 무관 자신은 십년 만에, 그것도 요행히 연줄이 닿아 안주 병사 자리 하나 얻어 하게된 그야말로 미관말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은 자리마저 하루 아침에 떨어질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입한번 잘못놀렷다가 이런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됐으니, 입이 화를 부르는 문이라는 말이 꼭 자기를 두고 만들어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우암이 무관의 급변하는 안색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그 무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다짜고짜로 우암의 따귀를 보기 좋게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우암의 얼굴에 무지막지한 무관의 손이 올라 붙은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무관의 입에서 일장 연설이 쏟아져 나왔다.

"이 고약한 첨지 놈 같으니 네 놈이 어찌 우암 송시열 대감의 존칭을 사칭하는고? 우암 대감으로 말하자면 문장과 도덕과 식견이 당대를 흔드는 분인데, 네깟 영감쟁이가 어찌 감히 송시열 대감을 사칭한단 말이냐? 고얀 놈 같으니! 외람된 칭명을 당장 취소하지 못할까?"

그러고는 말을 그치기가 무섭게 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달려 북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우암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젊은 무인의 기지를 다시 한번 칭찬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실로 대단한 대장부다운 임기응변의 기지로다. 이야말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장부의 재치가 아닌가. 능히 일감 하나 맡길 만한 사림일쎄 그려."

그 후, 우암의 뺨을 때린 그 무관은 오히려 벼슬이 높아졌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는 아주 대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추억만들기 클럽
글쓴이 : 신선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