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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우리나라의 고려 공민왕 때 대단히 우애가 깊고 조그마한 농토를 가지고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한 형제가 있었다. 어느날 이 형제가 길을 가던중 동생이 황금덩이를 줍게 되었다. 아우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다 가지고 싶은 욕심이 솟는 것을 누르고 형과 반씩 나누어 갖기로 하였다. 이윽고 강가에 이루러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배가 중간지점 정도 왔을 때 동생이 갑자기 금덩이를 형 앞에 내어놓더니 "형님, 제가 이금덩이를 발견하기 전 까지는 형님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에 조금의 흠도 없었는데 이 황금을 발견하고 나누어가질 생각을 했을때 욕심이 생기고 형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전 이 금덩이를 저 강물에 던져 버릴려고 합니다" 그러자 형님이 아우의 손을 잡으며 "그래, 네말이 맞구나"하면서 둘이서 힘껏 금덩이를 강물 한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자 할 때, 장애가 되는 것은 서슴없이 제거해야 한다.
당신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미련없이 던져버릴 결단이 있습니까?
[단 3:16-18] (18)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화목케하는 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 15:25-32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비로서 정신 차리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가지고 나갔던 재산을 다 없애 버리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비참한 몰골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한심한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습니다. 사랑으로 맞아 준 것입니다. 죄와 잘못과 실수를 따지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지위와 권리를 단번에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아들의 권위를 회복 받은 그 아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치유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이 너무 기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노래하며 춤추며 잔치를 즐겼습니다.
가. 분노하는 맏아들(25-30)
1. 맏아들은 둘째 아들과 달랐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고, 아버지 밑에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반항하고 떠났을 때에도 맏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속 썩일 때에도 맏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믿고 안심하고 무슨 일이든지 다 맡길 수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 맏아들이 밭에서 성실하게 일하다가 집을 돌아왔습니다.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집의 분위기가 전혀 달랐음을 눈치챘습니다. 동생이 집을 떠난 이후로 집안 분위기는 매우 가라 앉아 있었고 슬픔과 염려가 가득 차 있었는데, 오늘은 갑자기 노래 소리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났습니다. 전혀 에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맏아들은 무슨 영문인지 종을 불러 물어 보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은 모두 없앴지만, 몸 건강하게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2. 맏아들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28) 아버지의 불공평한 처사를 비난했습니다.(29.30) 맏아들은 불손하고 불경스럽게 아버지께 대들며 이야기 했습니다. 우선 먼저 자신이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아버지께 순종하고 성실하게 일해왔던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성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염소새끼 하나 주어서 친구와 즐기도록 위로한 일이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불순종하고 불성실 했음에도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했다는 데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갑자기 마음에 서운한 감정이 치솟아 올라서 그 모든 감정을 아버지께 모두 쏟아 놓게 된 것입니다.
1) 맏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곁에서 아버지 집의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온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리는 것들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2) 맏아들은 자신과 동생이 받는 대우를 비교했습니다. 동생은 불성실해서 꾸중을 듣고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자신은 성실하기 때문에 큰 상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불공평하다고 불평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만 편애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불평했습니다. 비교하면 불평 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맏아들은 자기가 유리한 점, 좋은 점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동생에게 잘해 준 것은 불공평하게 생각하고 아버지의 편애를 비난한 것입니다.
3) 또 맏아들은 받는 대우를 물질로 계산했습니다. 동생은 살진 송아지를 받았는데, 자신은 염소 새끼도 받지 못했다고 아버지의 사랑을 물질로 계산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받으면 대우를 잘 받는 것이고, 염소새끼 하나 못 받으면 대우를 잘 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4) 또 맏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고 성실하게 일해온 것은 물질적인 보상을 위한 것임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해서 순종하고 성실하게 일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가 아닌,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는 이해관계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가정 식구들이 부모와 자녀간에, 형제들 간에 사랑의 관계가 되지 못하고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되면, 그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엊저녁에도 뉴스에 보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왜 가끔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 아버지를 비난하던 맏아들이 이제는 분노해서 동생도 비난했습니다.(30) 1) 맏아들은 자기 동생을 부를 때에 ‘동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라는 대명사는 경멸적인 말투입니다. 자기 동생을 피를 나눈 형제로 생각하지 않고, 형제의 관계를 자기 마음 속에서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동정은 생기지 않고 분노하면서 비난만 한 것입니다.
2) 또 맏아들은 동생이 “아버지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정확하게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을 추측해서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추측하고, 그것을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3) 맏아들은 자기 동생을 비난할 때도 역시 “아버지의 살림”, 즉 물질을 기준으로 해서 비난했습니다. 물질을 잃은 것을 비난했습니다. 사람이 돌아온 것을 감사하지 않고 물질 없어진 것을 비난했습니다. 물질은 없어졌지만 사람이 돌아왔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물질이 없어진 것을 비난했습니다. 이 맏아들은 마음 가운데의 염려를 드러낸 것입니다. 아버지 재산이 모두 자기 몫인데, 동생이 자기 몫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자신의 몫을 또 가져갈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자신이 물질적 손해 볼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이해관계를 가지고 따진 것입니다.
4) 맏아들은 이치를 따져서 조리있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자신이 불평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말했습니다. 물질과 수치를 따져 가면서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말한 것이지, 사랑을 따라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이해관계만 있었고, 사랑은 없었습니다. 동생과의 혈연관계, 아버지와의 혈연관계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을 비난하면서 가정에 모처럼 찾아온 평화와 기쁨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나. 화목케 하는 아버지(31-32, 28b) 1. 맏아들이 이렇게 대들자 아버지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지금 동생이 돌아와서 기쁨으로 잔치를 해야 하는데, 형이고 그 집의 맏아들이라면 당연히 기쁨의 잔치에 참여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시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늘 순종하는 아들이 반항하고 대들면서 아버지와 동생을 비난할 때에 그 아버지가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둘째 아들을 맞아들인 것 같이, 분노하며 반항하는 맏아들을 역시 맞아 들였습니다.(28b) 아버지는 분노하며 불평하는 맏아들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1) 아버지는 맏아들의 성실함과 기득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31) 맏아들이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어서 아버지가 믿고 신뢰하는 성실한 아들인 것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기대하고 있고 의지하고 있는 아들인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2) 또한 맏아들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31b) ‘지금 현재 남아있는 재산은 모두 맏아들 네 것이다. 네 것을 동생에게 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안심시켰습니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대드는 그 반항하는 아들을 사랑으로 다 받아들여 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옛 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왜 자식에게 집니까? 힘이 모자라서 집니까? 이론이 딸려서 집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지는 것입니다. 가정을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버지가 넓은 사랑을 베푼 것이고, 그 사랑으로 아들에게 진 것입니다.
2. 그리고는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혈육과 가정을 강조했습니다. 32절 말씀을 보시면,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맏아들은 동생을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동생인 것을 강조했습니다.(32a) 분노하고 불평하는 맏아들,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한 혈육인 것을 강조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어떤 실수를 하고 죄를 지었든지간에, 그들은 모두 한 형제이고 한 가족인 것입니다. 밉든 곱든 한 가정의 식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 안에서 식구들끼리 갈등도 있을 수 있고 다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과 다툼을 해결할 때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한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틀 안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실수하고 잘못했어도 그래서 미워도, 동생이고 형제이고 한 가정의 식구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2) 가정이라는 공동체는 물질이나 이해관계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은 사랑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물질은 잃었지만,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32b) 기독공보에 보니까 세종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황호찬 교수님이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그 분이 쓰시길, 기업에는 재무제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재무제표는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헌금흐름표로 구성이 되는데 이 재무제표를 가지고 그 기업의 재무상태, 영업성과를 판단하고 기업가치를 측정하지만, 숫자가 나열돼 있는 재무제표만을 가지고는 기업의 가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회사 직원들의 업무능력, 고객 만족도, 브랜드 충성도, 기술개발능력, 경영자의 비전, 암묵적 지식, 구성원 간의 커뮤니케이션, 기업문화 및 분위기, 기업의 윤리성 등을 객관적으로 계량화 하여 재무제표에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중요한 요소들이 재무제표에 표시되지 않아 금전적 숫자만을 가지고 기업의 가치 판단이 힘들다고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교인 수만으로는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거듭 난 성도가 얼마나 되느냐, 예수 닮아가는 성도가 얼마나 되느냐, 이웃 섬기는 성도가 얼마나 되느냐를 숫자로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를 교인수 만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이나 교회가 물질이나 숫자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정이나 교회는 사랑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를 가지고 그 가정이 훌륭한 가정이냐, 건강한 가정이냐, 살아있는 가정이냐를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물질을 잃었지만, 사랑을 가지고 그 가정을 세워 나갔습니다. 큰 사랑으로 둘째 아들도 용서하고, 맏아들도 받아들임으로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고, 가정을 세워나갔습니다.
오래전 가이드포스트라는 책에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노트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노트를 펼쳐보니까 평상시 아버지가 사랑하시던 사람들의 이름이 그 노트에 쭉 적혀 있었습니다. 맨먼저 가족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 친구들과 이웃들이 이름이 나왔는데, 끝부부에 가니까 생소한 이름들 20여명이 쭉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트를 어머니에게 보여 드리면서 이 노트가 무슨 노트냐고 물었더니, ‘네 아버지의 기도노트’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그 노트를 펼쳐놓고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짚어가면서 조용히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럼 맨 마지막에 있는 이름들은 잘 모르는 분들인데 이 분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 사람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들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지만, 마음을 상하게 했던 미운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은 우리가 ‘사랑’ 장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고전 13장 1-3절 말씀에는 방언이나 천사의 말이나 예언이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능력보다도 사랑이 더 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제나 몸을 불사르는 열정의 봉사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1-3)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이해관계를 초월합니다. 사랑은 논리나 물질을 뛰어 넘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고 다투는 사람들을 모두 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은 가정과 교회를 화목하게 하고, 하나 되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악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성탄절에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큰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으로 죄인된 우리 인간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큰 사랑으로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화목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으로 신앙 공동체를 세워 나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으로 가정을, 교회를, 우리 사회를 화목하게 세워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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