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을이 있었다. 한 마을은 감사촌이고 다른 한 마을은 불평촌 이었다.
불평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불만이고, 무엇이든지 근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매사에 분노하고, 또 좋은 일이 일어나도 혹시 잘못되어 다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예상을 하면서 걱정을 했다.
담배 연기가 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들에게선 잠재적으로 불평과 불만, 근심의 연기가 항상 입에서 나왔다. 불평촌 사람들은 주소가 그 동네이고 또 모두가 불평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사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했다.
고생을 해도 감사하고 또 시련을 받을수록 감사의 농도는 더욱 깊어졌다.
봄에는 꽃이 피는 것에 감사했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것에 감사했으며, 가을에는 추수하는 것에 감사하고 겨울에는 나뭇가지는 앙상하지만 그 뿌리가 있는 것에 감사를 했다.
하루는 불평촌에 사는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왔다가 감사하는 소리에 놀랬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감사를 배웠다.
그러나 하루종일 범사에 감사하다가 저녁이 되어 불평촌에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에이. 감사촌에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감사만 하고 왔네."
감사는 감사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감사촌으로 이사를 와야만 되는 것이다.
감사촌에 이사오기 위해서는 불평촌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그곳에 놓고 나와야 된다.
그리고 감사촌에서는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 무에서 출발한다면 모든 것이 감사하다. 옷 한벌, 밥 한끼가 감사하게 된다.
불평촌은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위치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고, 감사촌은 바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음을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감사촌에 있든지 불평촌에 있든지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 '주님의시선' 카페와 카페지기가 섬기는 '마산시민교회'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감사 노래 불러라
시 118:1-4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림 가운데 프랑스의 화가 밀레(J. Millet)의 "만종"이라는 그림이 있다. 19세기의 종교화가 인데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성찰하며 땅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경건미를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의 흥사단 운동을 계승해 가고 있는 석학 안병욱 선생의 글에 이 그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 그림에서는 일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훌륭한 관찰이요 심미안을 지닌 사람의 평가라 여겨진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성숙해진다. 아울러 한 날의 괴로움을 그 날에 족한 줄로 여기고 일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아름답고 어른스럽게 한다. 교회 안에서 흔히 말하는 삼박자 축복이란 바로 일과 기도 그리고 감사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으로 승화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나의 축복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더더욱 특별한 축복이다. 아무나 기도할 수는 없다. 은혜 받은 사람, 특별한 소명감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자기의 불완전함을 아는 사람,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 더 큰 일도 수행할 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줄을 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생활은 빈곤의 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진 허기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씨 뿌리는 사람"의 그림이지만 그의 희망은 추수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성시와 찬송가와 신령한 노래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하십시오"(에베소 5:18)
1895년엔 미국의 남부 알라바마 주에는 일대소동이 벌어졌다. 목화벌레 소동이었다. 목화농사로 부를 구가하던 알라바마, 그 농장에서 흑인노예들을 착취하던 백인들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쳤던 것이다. 그들은 생각 끝에 목화 농사 대신 "낙화생" 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이곳은 세계적 낙화생 영농지가 되었다.
알라바마 주민들은 이를 기념하여 한 동상을 건립했다. "목화 벌레"동상이다. 그들은 그 동상의 주춧돌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목화벌레에 대해서도 심신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이 벌레는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를 주었다."
옛날 히브리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 118:5- )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을 주셨다. 그리고 그 땅에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달란트를 주셨다. 알라바마의 땅은 목화농사에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낙화생 농사에도 적합한 땅이다. 그와 같이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을 여러 가지 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직업적 선입관이나 전통적 관습에만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날마다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윤리, 새로운 사상,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알라바마는 낙화생 농사로도 유명하지만 흑인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M.L.King)목사가 백인들에 의해 암살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총도, 몽둥이도, 돌도 가지지 않은 그에게 총을 쏜 사람들, 그들은 알라바마 땅은 하나님께서 백인들에게만 부여한 땅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킹 목사의 죽음은 알라바마 주 뿐만 아니라 전 미국땅이 백인과 흑인 그 밖의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땅임을 밝혀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 점에 있다. 킹 목사는 흑인들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이 충고하기를 잊지 않았다.
"비록 거리의 청소부 일찌라도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베토벤이 노래를 작곡하듯 여기 흑인 아무개 청소부가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 놓으라"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만이 흑인의 해방이요 승리라는 뜻이다.
존 와너메이카((J. Warnermaker)의 소년시절 이야기 가운데 있었던 일이다.
그는 후일 세계 최대의 백화점 왕 이였고 YMCA운동가였고 체신부장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어릴 적에는 너무나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어서 벽돌공장의 직공으로 자랐다. 그러나 주일이면 빠짐없이 교회를 찾는 신실한 신도였다.
19세기의 미국은 결코 부요한 나라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다니던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오솔길이 흙탕물로 더러워져서 출입하는 사람들이 곤혹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난데없이 그 길 여기저기에 벽돌이 깔려 있었다. 그 다음 주일에 더 많은 벽독이 깔려 있어 신도들에게 편이를 주었다.
이에 놀란 목사님이 세 번째 주일 이른 아침 예배당에 숨어서 그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어린 소년이 벽돌을 지고 와서 또 깔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소년이 바로 와너메이카였다.
그는 주급으로 받은 품삯 가운데 십일조를 떼어 벽돌을 구입 예배당 길목에 깔았던 것이다.
이 사실이 온 신도들에게 밝혀지자 신도들은 모두가 일대각성, 마침내 예배당을 새로 단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유명한 부흥목사 스폴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별빛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달빛을 주실 것이다.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을 주실 것이다.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마음의 빛, 영혼의 빛을 주실 것이다." 마음의 빛, 영혼의 빛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한국의 신도들은 무엇이든지 세계 제일, 온 세상을 몽땅 차지하려는 엄청난 기적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한 사람에게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목적하여 선교하는 것임을 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적더라도 능히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고도 남는다.
병 고침을 받고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 일에 감사하여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한 사람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사람이다. 풍년이 들어 엄청난 추수를 하여 곡간을 확대 수리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자기소유를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한 사람이 이 땅을 복음화 하는 역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사람인가? 사람이란 창조된 존재이다. 은혜의 빚을 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람됨의 참 모습은 감사이다. 그 비결은 찬양이다"(A. 헤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창조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얼마일까?
한국에는 1천만의 그리스도 신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 가운데 얼마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사람됨의 참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교회는 사람을 본래의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선교기관이다. 본래의 사람의 참 모습은 감사하는 것이다. 그 비결은 찬양이라는 헤셀의 말은 백번 지당한말이다. 그래서 옛날 시인은 노래하였다.
"야훼께 감사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시 118:1-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는 언제나 빚진 존재이다.
그 빚은 계약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에서 진 빚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참 사람은 늘 감사하며 노래 불러야 한다. 거듭 감사노래 부르며 살아야 한다. 빚을 진 사람은 그것을 갚아야 한다. 그것이 곧 부르심을 받은 것이요 사명을 가지는 것이다.
그 부르심, 그 사명은 복음의 선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