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대의 한 상관이 부하들에게 소리지르기를 “이 멍청이들아, 어서 이리로 모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하들이 급하게 뛰어왔는데, 나중에 보니 한 명이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상관은 그 빠진 부하를 데려오게 하더니 “야 임마, 너는 뭔데 모이지 않는거야?”하며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그 사병은 이렇게 당당하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멍청이들이 이만하면 됐지 않습니까? 더 많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가치함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을 통해 당신의 양자됨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가치는 진정 주님 안에서 인정되고 진실해질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부족한 것은 당당함이나 세상을 밝게 볼 줄 아는 자신감이다.,
당신의 가치는 세상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이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 '주님의시선' 카페와 카페지기가 섬기는 '마산시민교회'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2. 마산시민교회가 개척 1주년을 맞았습니다. 자립하는 날까지 기도와 물질의 후원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개척교회를 후원할 수 있는 교회나 성도님들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4:7-10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사람들의 외면을 받으며 살아 온 아이가 있었습니다.
13살이 되었을 때 그를 상담했던 선생님이 그에게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도 모르는 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사춘기가 되었어도 아이들은 그와 사귀려 들지 않았고, 그는 늘 남자아이들과 싸움판을 벌이곤 했습니다. 지능 지수는 매우 높았지만 학교 공부는 늘 하위권에 머물렀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마침내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해병대에 지원하면 그를 받아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해병대에 입대하면 남자다워진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문제들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다른 해병 대원들이 그를 비웃고 조롱했고 그래서 그들과 싸움을 벌이고, 상관의 명령도 순순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마침내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됩니다. 그는 이런 모든 문제에서 도망쳐 보려고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외국에 있는 동안 어느 여인과 결혼하여 고국으로 데려왔는데 그 여인도 사생아로 태어난 여인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여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녀를 둘이나 두었지만 아버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존경도 받지 못했고 권위와 지위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결혼 생활은 점점 파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날마다 더 요구했습니다. 이 가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내가 자기의 동료가 되어 주기를 바랐지만, 아내는 가장 심술궂은 적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무도 그를 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배척을 받은 자가 되어 버렸고 그의 자아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차고로 가서 숨겨 두었던 총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얻은 직장에 있는 서적 보관 창고로 갔습니다. 그 날 오후, 1963년 11월 22일, 그는 건물의 6층 창문을 통해서 두 발의 총알을 날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명중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배척을 받고 사랑 받지 못한 자 [리 하비 오스왈드]는 평생동안 비참하게 살아오면서 배운 단 한 가지 기술을 사용해서 자신이 소유하지 못했던 성공, 아름다움, 부, 행복, 그리고 가족의 사랑을 모두 가졌던 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누가 내게 관심이나 보이는가?" [오스왈드]에게는 이처럼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난폭한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책임이 없다고 면죄부를 줄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 내면의 고통과 혼란을 이해한다면 그를 악한 암살자로만 보지 않고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으로도 보게 될 것입니다.
외로운 어린 시절부터 텔레비전에 방영된 대로 죽음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그는 열등감에 시달렸고, 마침내 그 슬픔은 분노로 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스왈드]의 비극보다 더한 비극은,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오스왈드의 비극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열등감(劣等感 : inferiority feeling)>이 문제입니다. <열등감(劣等感 : inferiority feeling)>이란 말을 사전에 찾아보면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는 뒤떨어졌다거나 자기에게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등감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오느냐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에서 옵니다.
첫째는 신체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키가 작다 라든지, 다리가 짧다 라든지, 혹은 기형이나 질병으로 생긴 신체적 이상으로부터 오는 열등감입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학교성적이 나쁘다, 운동을 못한다, 미인이 아니다 등입니다.
셋째는 사회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학력, 인종이나 신분에 의한 차별, 언어 ·빈곤 ·왼손잡이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열등감이 별다른 원인 없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면 이것이 <우울증>이 되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열등감을 가진 사람의 성격은 소극적이고 주저주저하며 내성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매우 공격적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 보상을 하려고 합니다.
학력에 대하여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 부자가 되어 여봐란 듯이 행동하는 경우나, 학교 성적이 나빠 교사로부터 무시당하는 학생이 범죄행위를 하여 주시의 표적이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보기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부분 열등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머리가 나쁘다. 자란 환경이 나쁘다. 직업이 좋지 않다. 학력이 없다. 말을 잘하지 못한다. 의지력이 약하다. 몸이 약하다. 집중력이 없다. 등등....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나폴레옹]이나 [베토벤], [뉴턴], [에디슨], [처칠]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열등감의 덩어리]라고 할 만큼 열등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맥스웰 멀츠]라고 하는 의사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중 95%는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린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모든 사람이 열등감의 상처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세]도 이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고 (출 4:10) (출 4: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영적 거장 [바울]도 사도들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고후 11:6). (고후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고후 11: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그러나 그들이 열등감에 잡힌 일반 이들과 다른점은 그 열등감에 사로 집힌 노예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열등의식이 있다면 그 열등의식을 활용하는 방법도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신비롭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종류의 열성을 가지면 다른 능력이 개발되게 창조하셨습니다. 오른팔이 없으면 왼팔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되며, 시력을 잃게 되면 청각이 발달됩니다. 한쪽의 신장이 약해지면 다른 쪽 신장이 더 활발히 움직여 이를 보충하게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신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어딘가에 열성을 가지면 그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려는 마음의 활력이 강하게 작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관심 속에서 열등감을 몰아내고 강점을 살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예 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카라얀]이<신이 주신 목소리>라고 칭찬했던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70점이 나왔다고 합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 조수미씨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창피해서 얼굴도 들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화를 내고 나갔을까요? 아마 함께 한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다시 노래를 부르며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노래를 잘하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깟 노래방 점수 낮은 게 충격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기 안에 확실히 자부할 만한 보배가 있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우습게 생각해도 별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부할 만한 뭔가를 갖지 못한 사람일때 열등감이 들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부할 만한 보배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 이게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볼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여러분,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릇입니까? 아니면 내용입니까?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십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인생에 회의를 느끼지 않고 끊임없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자각해야 됩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 무엇입니까?
본문 7절의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질그릇의 모습>입니다. 질그릇이란 진흙으로 만든 거친 그릇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질그릇의 특징이 있습니다.
① 먼저는 연약함입니다. 쉽게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누군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언제 부숴 질지 모르는 한계를 가진 것이 질그릇입니다. 그래서 보호자가 있어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있는 보호자 말입니다. 그분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은 이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알고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이 강목사입니까? 아니면 이 나라의 대통령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익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앞길을 능히 지도하시고 해결해 나가실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질그릇인 우리는 그 분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한 시라도 보살핌이 없이는 깨어지고 부숴지는 자라는 자신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마음을 먹고 각오를 해도 잘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질그릇인 우리입니다.
② 또 다른 질그릇의 특징은 비천합니다.
비천하다는 것은 특별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평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 이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교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본래 모습을 잊고 살아가는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살아가면서 획득한 인간 조건들이 본래의 자기 모습인 줄 착각합니다. 재산, 사회적 지위, 학식 등이 자신의 실제 모습인 줄 압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 자신만만합니다. 그때부터는 자신이 연약하다 비천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는 개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세상이 그렇게 살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더욱 슬픕니다. 인간 본래의 자기모습을 잃어버리고 철저히 포장된 자가 대접을 받는 시대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시103:14-16 보면 우리를 가리켜 <진토(dust)>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마치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바람이 불면 사라져버리는 들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런 실상을 모르고 그저 지금의 내 모습이 천년만년 계속될 "영원한 내 모습"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겸손하게 나 자신의 본래 모습이 연약하고 비천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교만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 <임시 보관용>이요 <위탁물>일 뿐입니다. 시간 차이일 뿐 언젠가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재산도, 지위도, 학식도, 재능도, 젊음도, 건강도, 목숨까지도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란 가치 없는 생을 살다가 가는 단순한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질그릇 같은 우리 인생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질그릇에 담긴 내용물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무엇이 담긴 질그릇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같은 그릇이라도 기왕이면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면 좋겠죠. 그러나 그릇의 재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겨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내용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도자기라 할지라도 그 안에 오줌이 들어 있으면 요강이 되고, 쓰레기가 들어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라도 보물이 담겨지면 보물 단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내용물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보배>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인간 조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우리 가운데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습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가벼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마음에 담은 자답게 사십시오. 그것이 질그릇인 우리의 인생이 빛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입니다.
이생과 저생의 모든 키를 가지신분.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원천을 가지신 그분을 모시고 사는 인생 바로 그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생으로 끝나는 축복이 아니고 그대로 저생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원천, 바로 그 원천을 담고 사는 그릇이 가장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비어 있는 질그릇이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재물과, 학식과,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가득 담긴 위장 된 질그릇이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철학, 예수님의 말과 행동, 이 모든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부끄럽지 않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