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일일예화말씀묵상 2011년 3월 2일 (수) - 물질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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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영국 동부의 작은 시골에서 목수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한 가정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했으나 그 가정은 화목하게 지냈으며, 또 마을에는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를 하였다. 그 마을 전체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가뭄이 들던 해 이 가정에도 궁핍이 찾아들었을 때 마침 런던시에서 보수가 좋은 일자리가 있음을 알고 그곳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들이 이사간 곳은 런던시 서쪽에 위치한 몹시 환경이 불경건한 빈민가였다. 이사하고 난 얼마 후 그 가정은 경제적으로 얼마간 풍족해졌다. 하지만 그 풍족함으로 신앙을 잃고 말았다. 그 가정의 자식들이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배금주의가 교회와 성도간에 만연해 있다. 오늘 당신에게 있어서 하나님 보다 더 마음을 가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엡 4:22-24]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구원받은 가정 눅19:1-10
가정은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곳입니다. 가정생활이 건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사회생활과 교회생활이 건전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만큼 가정을 중요시 여기는 책도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첫 번째 하신 사역이 무엇입니까?... 바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만드시고 축복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축복은 가정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복을 받은 일이나, 롯의 가정이 축복을 받은 일이나, 하나님은 가정을 단위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을 보면, 개인의 신앙은 강조하면서도, 가정 전체의 구원은 소홀히 여기는 분들이 없지 않아 많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창기를 보면, '인가귀도'라 해서 - 온 가족이 다 함께 예수 믿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이요, 기뻐할 일인지, 크게 장려했던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온 가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행복하지 못한 가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합니까?... 가정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마땅한 가정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처나 분열이 없는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은 더럽고 피하고 싶은 똥과 같은 존재다." 이 말은 지난 3월19일, 한국을 방문한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가 어느 인터뷰에서 가정에 대해 말한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소설 <가족 시네마>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열도에 '유미리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주인공, 그는 주로 가족의 문제를 다룬 현대 작가입니다. 그가 쓴 <가족 시네마>는 부모가 별거하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이 20년만에 '가족 영화를 찍겠다'는 어느 영화 감독의 제안으로 한 자리에 모이면서 벌리는 반목과 해프닝을 그린 소설입니다.
소설 속의 가족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으면서도 각자 자기 분열적인 폐쇄회로를 풀지 않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증오와 혐오감만 커질 뿐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 스토리는, 가족에 대한 통념을 여지없이 깨부순 책으로서, 일본에서는 무려 23만5천부나 팔려 나간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가정의 평화가 곧 개인의 행복일 수 있는가?...'
유미리의 작품세계는 늘 죽음·소외·자아 상실 같은 회색빛 풍경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현실 사회는 그다지 살 만한 곳이 못됩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가족의 일원이라기보다는, 마치 '제3자' 처럼 서로를 관찰하며 가족의 상처를 무심히 견디어낼 뿐입니다.
유미리의 작품을 보면서, 이것이 그의 얼룩진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반영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결손가정에 자랐습니다. 도쿄 근처의 가나가와 현에서 살던 그는, 부모가 이혼할 때 겨우 아홉 살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빠찡꼬 업소에 종사하던 아버지와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그리고 파편처럼 흩어진 동생들, 짧은 학창시절이었지만 그는 내내 일본 아이들에게 이지메 - 즉 급우들의 집단 괴롭힘을 받으며, '실어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반복되는 등교 기피로 자주 무기정학을 당하던 그녀는, 결국 고등학교 1학년 이 되자 가출 소녀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합니다.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가족과 학교를 잃었을 때, 내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고 그녀는 독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절대로 깨어질 수 없는 제도로 여겨지던 우리들의 가정이 오늘날 유미리의 가정처럼 얼마나 산산조각 나고 있습니까?... 10년 전, 제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거기에는 이혼이나 별거로 결손 가정의 자녀들만 다니는 사립학교가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저런 학교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를 계속 놀라게 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독신자들만을 위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동성 연애자들을 위한 선교 프로그램이 교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한국도 이런 문제에 예외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지난 10년 동안 결혼한 부부 가운데, 6쌍중 1쌍 꼴로 이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도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정의 붕괴가 남의 일이 아니게 됐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가족이기 때문에 한 지붕 아래서 산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는 말하기를 "가족을 테마로 소설을 쓰는 동안 취재를 위해 수십 가구를 방문했다. 처음엔 어릴 적부터 꿈꿔 온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에 대해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나무랄 데 없는 가정도 어디엔가 금이 가 있었다. 균열이 없는 가정은 단 한 곳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유난히 가족의 문제가 구체적인 갈등으로 도드라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잡지사에 근무하는 강희진씨(27)는 "일과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내 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생활에 쫓기다 보니 집에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적어졌고, 자연히 가족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고 말했습니다.
전문성과 개인성을 요구하는 후기 산업사회에 적응하다 보면,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시간은 자연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또한 '가정의 평화가 곧 개인의 행복'이라는 과거의 도식과는 달리, 전형적인 가족의 역할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교육 기회의 확대로 개인의 주체적 인식이 강화되었다던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던가,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던가, 모든 생활이 개인주의화 되었다던가 하는 현상은 가정의 붕괴를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가치관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현대인들은 '가족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변화순 박사는 말하기를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개인의 정서적 만족을 지키기 위해 이혼이나 독신을 택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현대의 가족 구성원들은 나름대로 삶과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생겼습니다. 과연 그 새로운 가치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전통적인 가정의 개념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문학에서, 그것도 자신의 실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이른바 '유미리 열풍'은 가족의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붕괴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예고하는 역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 유미리는 현대 가정의 상처를 예리하게 파 헤쳐 놓았을 뿐,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불우한 불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틀을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여리고에는 부자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토지가 비옥한 고장으로, 요단 계곡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에는 울창한 종려나무 단지가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삼 향나무' 숲이 우거져, 그 향기가 멀리까지 퍼졌나갔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는 대추야자와 발삼 향유를 무역해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여리고는 세금도 많이 거둬지는 과세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도시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위임받은 세금 보다, 2배 3배 가중하게 탈취해서 자기들의 몫을 챙기는 로마의 앞잡이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에게서 많은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 당시, 세리를 창녀와 동급의 죄인으로 취급했겠습니까?...
그러나 삭개오는 너희들이 멸시하든 말든, 천대하든 말든, '머니 머니 해도 MOONY가 최고야' 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돈을 긁어 모았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참 요지경 속이지요?... 뒤에서는 이러쿵저렇쿵 하면서도, 장작 돈 있겠다, 권력 있겠다, 남부러울 게 없게 된 삭개오의 집에는 돈 독이 오른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삭개오가 행복했습니까?... 떵떵거리며 사는 그의 겉사람은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속사람까지 행복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돈은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지만, 삭개오의 마음에는 늘 괴로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고독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 큰집이 황량한 사막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호화로운 가재도구가 광야에 널려져 있는 바위덩어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삭개오에게는 진정 평안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은 세리 삭개오였지만, 그에게도 영혼 저 깊은 곳에는, 제사장 같은 종교심이 있었고, 바리새인과 같은 양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도 영혼이 깨어날 때마다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양심이 불의에 부딪힐 때마다 죄를 뉘우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언제나 괴롭고 불안한 나날을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욕에 눈이 어두운 세리였지만, 그때마다 그의 마음은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아픔을 느꼈고, 그의 심령은 불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 많은 부자 삭개오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부자면 뭘합니까?... 인생은 다 적신으로 왔으니 또한 그와같이 빈 손 들고 갈 뿐입니다. 한 평의 땅, 한 개의 관이면 족한 것이 인생입니다. 때문에 돈이 많다고 행복하고, 부자라고 마냥 만족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실업인이 자기 재산 600억을 사회에 환원시키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어떻게 그런 굉장한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말하기를 '그 많은 돈을 가지고도 행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도, 여리고에서는 지역 사회의 유지요, 지도자로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예도, 그 유명으로도 그는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돈은 독점했으나, 행복을 독점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높고 큰집에 호화스럽게 살았지만 행복이 없었습니다. 이름을 휘날리는 지위는 얻었지만, 만족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삭개오는 불안과 고통을 벗어 던지기 위해, 행복을 찾아 나섰습니다. 작가 유미라가 찾아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한 새로운 가치관을, 삭개오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2. 예수를 영접한 가정
그래서 삭개오는 때때로 회당에 가서 바리새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 가운데도 아마 삭개오와 같은 심정으로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 불안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사장이 집례하는 제사에도 참석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민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저 유명한 예수가 여리고 성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여리고 성의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은 기적의 예수, 치유의 예수님을 보기 위해, 너도나도 총출동해, 나왔습니다. 이때 삭개오도 예수님을 보기 위해 길가로 나아갔습니다. 이 예수야말로 내가 찾고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닐까?... 삭개오는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 또 하나의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키가 너무 작았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길가에 심겨진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렇다면, 삭개오의 이런 행동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한 도시의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가 아닙니까?... 그것도 연령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도 보나, 어린아이들처럼 뽕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체면도 불사하고 뽕나무에 올라가게 한 것일까요?...
그에게는 지금 너무나 절실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위, 잠시 머물다가 가는 재물, 일시적인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삭개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영원한 가치와 은퇴할 때까지 걱정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직업, 그리고 평생을 안심시켜 주는 위안이 필요했습니다. 삭개오는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용기를 발휘했던 것입니다.
뽕나무를 기어올라갈 때, 그의 머리 속에는 '내가 부잔데, 내가 적어도 이 도시의 세리장인데, 내가 그래도 한 집안의 가장인데'... 뭐 이런 생각을 안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 무엇입니까?... 그 문제가 해결되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체면, 여러분의 지위, 여러분의 명예 다 벗어 던지세요. 그리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뽕나무에라도 올라가겠다는 용기와 결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삭개오는 그 때 자기 앞을 지나가던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삭개오의 눈과 얼굴에는 주님을 갈망함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과 삭개오의 극적인 만남을 이루어집니다. "삭개오야!"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여러분과 저를 부르신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불타는 심정을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삭개오가 미쳐 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친히 간구케 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아니 너희 선생 예수는 어찌하여 죄인의 집에 유하려 하느냐?' 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의인을 구하려 오지 않고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께서는, 울안에 있는 양을 내어두고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바로 그 길 잃은 양이 그날은 세리 삭개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집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이 순간 삭개오는 놀램과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1:11-12)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표시입니다.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 속에 주 영접하며 / 새사람 되기를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 의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 맘 문 다 열어 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327장)4절 다같이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 해주고 뺨 맞는다고, 이 여종은 바로 그 귀신의 신통력으로 점을 쳐 주는 점쟁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버렸으니, 점쟁이의 장사를 다 망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업무 방해죄로 관헌에다 고소를 해 버렸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객지라 누가 하나 변호해 주는 이 없어,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바울과 실라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고 억울하다고 원망했습니까?... 아니면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낙심해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갑자기 지진이 나더니 옥문이 열리기는 기적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때 간수가 달려와 보니, 감옥은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옥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아무래도 죄수들이 다 도망한 모양이구나 하고 지레 겁을 집어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급한 김에 칼을 빼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소리 질러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당신은 걱정하지 마시오!' 하고 만류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간수는 바울과 실라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평생 감옥 아닌 감옥생활 하면서 자식들 키우느라, 가장 노릇하느라, 승진하는 맛에, 돈 버는 맛에 이 자리를 떠나지 못했는데, 이 기쁨이 없는 생활, 보람없는 생활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이며,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퇝그때 저 유명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말씀이 전하여 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로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상처를 치료해 드리고, 좋은 음식을 대접한 다음, 온 집안 식구에게 세례를 받게 하니, 그 집이 구원받은 가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3. 회개하는 가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 혼자 만이 아니라, 우리 가정 모두가 함께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잘 대접해 드리는 것입니까?...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수성찬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를 지나던 예수의 일행은 정오가 되자 시장 끼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사러 제자들을 성안에 들여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무슨 일이 발생했습니까?... 야곱의 우물가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수가성 온 동네를 구원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음식을 가지고 온 제자들이 도착해서 예수께 잡수시기를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으니 시장하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요4:32) 아니, 도대체 그 동안 무엇이 예수님을 배부르시게 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구원받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될 때, 육신의 그 어떤 음식을 드시는 것보다 흡족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분주한 마르다 보다, 예수님 앞에서 말씀 듣고 있던 마리아를 더 칭찬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를 영접하고 나니, 삭개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하였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했습니다. 그 돈이 어떻게 긁어 모은 것입니까?... 그 도안 힘없는 약자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법자로 군림했고, 상관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갖은 아부와 상납을 마다하지 않은 그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처럼 돈에 혈안이 되었던 삭개오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한 단계 더 나아가 뉘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예수를 가장 잘 대접하는 비결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같이 진수 성찬으로 대접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개의 눈물을 더 기뻐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 삭개오는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재산을 모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삭개오는 세리장이란 지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진급하고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보람이 없었습니다. 그 동안 그는 아내와 자녀들 거느리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에는 참 평안과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 그의 가정에, 그리고 그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그들 가정에 지금까지 없었던 행복과 평안과 보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그에게 위대한 결심이 생겨났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죽을 때 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유언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았을 때,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는 가정에 행복이 있고, 예수를 영접하는 가정에 즐거움이 있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갈망하는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회학교도 열심히 다녔고, 성경구절도 줄줄이 외웠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네가 영생하려면 지금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수심이 가득찬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부자 청년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보니, 지위보다도, 명예보다도, 아니 돈보다도 예수가 더 좋았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행복의 근원이었던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때 삭개오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세리 삭개오를 로마의 앞잡이요, 돈만 아는 노랭이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삭개오가 자기들과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버린 삭개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모든 식구들이 다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하여 구원받는 새 가정들이 다 되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