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능력 - G.그랜저 플레밍
서언 ㅡ 뭔가를 말해주는 인생
우리의 인생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의 인생과 연관을 맺게 되어있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라도 아무도 없다.
기독교의 목표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을 미치게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게서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즉 그것은 그분의 공표된 제자들인 우리의 마음과 삶 안에 그분께서 계속하여 거처를 정하시고 사심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재창조하시는 것이며, 당신 자신을 인간의 모양으로 재생산하시는 것이다.
나머지는 다 여기에 부속되는 것이다. 죄의 도말과 허물의 대속, 갈보리의 죽음, 무덤에서의 무활, 영관으로의 승천, 성령을 부어주심 등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과 방식을 좇아 인간을 재창조한다는 한 가지 목적에 귀결되는 것들이다.
우리의 현실 상황에 눈을 돌려보자.
내 인생은 뭔가를 말해주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인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삶이 나를 통해서 뭔가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뭔가를 말해주되 부족함 없이 충족하게 말해줄 수 있는 인생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예수의 자신의 인생이다.
그분은 1세기에도 '뭔가를 말씀하셨고' 기회만 있다면 지금도 언제나 뭔가를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그분의 기회이다, 내가 그분의 기회이다.
예수님께 이 땅을 사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린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놀라운 특권이다.
그분은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셨다.
그 분의 날은 짧았다.
막 인생의 황금기에 들어서자 끝이 찾아오고 말았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작은 길을 통하여 그분의 날을 보충해드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리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새로운 존재를 부여해주시는 그 통로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각자의 개성은 자신 되에는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그 독특한 소유, 여러분의 개성, 여러분의 성품을 가지시게 하여 그분이 성령으로 말미암마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통하여 다시 한번 뭔가를 말해주는 삶을 사시게 해드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제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부터 여러분 바신을 그분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겠는가? 내가 위대한 일꾼, 위대한 리더가 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예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하여 당신 자신의 영역을 찾으시도록 해드리는 것이다.
뭔가를 말해주는 인생!
그분이 쓰시는 그릇들은 그분이 손으로 만져주심으로 인하여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분이 부어주시는 물은 생명수이며, 친히 물을 길으시는 우물인 우리를 늘 넘쳐나게 해주실 것이다.
뭔가를 말해주는 인생!
그 인생은 여러분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의 우물이 될 것이다.
여러분이 그분 안에서 여러분의 삶을 '잃어버릴'때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그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성령이 여러분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넘쳐흘러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깨끗게 하고 새 힘을 주며 아름답게 할 것이다.
여러분이 영향력 있게 뭔가를 말해주는 삶을 원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삶이다.
그 삶은 이제 여러분 것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다.
적들은 여러분에게 찾아와 그 삶은 너무 훌륭한 것이어서 여러분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겠지만 거기 속아서는 안된다, 물론 그 삶은 우리에게는 너무 훌륭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삶의 영광이다.
바울같은 사람은 우러러보고 누가나 디모데같은 사람은 간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 역시 바울과 똑같이 그 삶을 살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과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은혜로 주어지는 권리이다.
그것은 선물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다.
이제 여러분은 이 생명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위대하신 선물을 그냥 단순히 받아들여 그 안에서 쉬면서, 그 무한한 생명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진해야 할 것이다.
뭔가를 말해주는 인생은 그리스도 자신의 인생이다.
그분은 계속하여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의 사람들에게 그 생명을 부여해주신다.
1. 기도를 향한 열망
산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의 산들이 만일 기도로 제거될 수만 있다면 나는 기도하기를 열망할 것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벅차보이기만 하는 이 적들이 기도로 간구함으로써 정복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구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기도하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필요가 크면 클수록 기도하기를 열망한다. 나아가 만일 내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안다면 나는 반드시 기도할 것이다. ......
기도란 모든 어려움들에 대해 위해단 해결책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꼐서 친히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살펴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마지막 동기
기도에는 우리의 개인적 열망보다 더 강한 동기가 있다. 우리의 이해, 우리의 인식, 우리의 슬픔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다 그분이 필요를 인식하고 계시다. 그분이 믿음이 식어하는 사람들을 보고 계신다. 그분이 타락하는 이들을 인해 슬퍼하고 계신다. 우리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하신다.
기도에의 부름에는 바로 이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고서 지금 나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인식하시고서 지금 나에게 기도할 것은 요구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들을 이해하시고서 지금 나에게 중보 기도를 명하신다. 나를 기도로 부르는 것은 위대한 필요에 대한 나의 부족한 인식이나 가냘픈 각성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겪으셨고 모든 것을 보시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이해하시고 모든 것을 총괄하여 알고 계시는 그분의 인식과 각성인 것이다.
그분은 내가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 여러분과 내가 기도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의 그 기도에 의존하시는 분, 그분이 다름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의 기도의 열망은 참으로 강한 열망이 될 수 있다.
그분이 기도를 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간절히 열망하신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즉 문제에는 반드시 해결책이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우리 또한 기도를 열망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힘과 그러한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3. 기도의 기능적 특성
몸이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나 쉼 등을 요구해오게 되고 그 다음에 말로써 하는 요구의 기능적 표현이 있다. 이것은 신체상의 과정이지만 영적인 것도 이와 비슷하다.
기도란 영혼의 어떤 특정 상태가 빚어내는 깊은 갈망의 표현이다.
갈망없이 기도하려 하는 것, 그리고 영혼이 한 목소리로 일치되지 않는 상태에서 기도하려 하는 것은 마치 몸이 아픈 아이로 하여금 먹을 것을 구하게 하려 하는 것과 같다. 우선 아이를 아프지 않게 해주면 그 다음에야 배고픔의 내적 요구가 생기고 그것이 곧 외적 표현으로 이어질 것이다. 기도는 필요의 인식에 기초해야만 한다.
영혼의 필요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종종 그 필요에 상응하는 인식이나 갈망이 뒤따르지 못한다. 그 결과 아예 기도를 하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생명없는 어조로 힘없이 기도하게 된다. 핵심적인 것은 요구 내지는 갈망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우리 영혼의 상태가 있다. 우리에게 열망이 부족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 올바른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의 사도바울의 명령을 읽으면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눅18:1) 하신 주님의 권고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기도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야만 한다는 것을 때닫게 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만일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도란 우리의 내면이 바로 되지 않은 한 결코 외면이 바로 될 수 없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리라"(마12:33)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흉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기 않기를 원하노라"(삼하21:14)
주님의 일을 아주 철저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분의 역사가 어디에까지 미치는지를 결코 알 수 없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를 훌륭한 '기도자'로 만드시려 한다면 그분이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우리에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행하셔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과정에서 뒤돌아서거나 실패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기도한다.
4. 머물러 기다리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7)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는 사람은 위대하신 일꾼이신 그분의 영향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나"(요9:4). 그분은 당신의 일이 다 이룰 때까지 늘 답답함 속에 있었다.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주소서 하라"(마9:37-38,눅10:2). 이 말씀을 하신 우리 주님께 있어서 일이란 커다란 열정의 대상이었고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소명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일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의존해있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9:4). "내가 하늘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
일을 하기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이다. 이해와 사랑뿐만이 아니라 그 뜻에 대한 완전한 굴복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이해, 사랑, 굴복이 모두 고요한 중에 생겨나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뜻을 묵상하고 이해하며 즐거워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뜻의 성취를 인해 준비될 수가 있었다.
여기서 생겨나는 또 하나의 문제가 즉각적인 순종의 문제이다. 고요한 중에 들은 말씀을 이제는 삶 속에 행동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들었으면 이제는 준비된 즉각적인 순종의 행위가 그 이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시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분의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방법을 따를 바에야 아예 시작하지 않을 수 있는 자세를 배워야만 한다. '나가서 밀치라'가 아니라 '머물러 기다리라' 인 것이다.
안연히 거하라. 하나님을 인정하라. 우리 영혼 안에서 일라시는 분이 그분임을 인식하라. 그분을 우리 영혼의 주인으로 인정하라. 우리 마음의 영역과 우리 삶의 일들 속에서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께 복종하라.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 먼저 우리 자신을 인식하고 우리 자신과 관련하여 그분을 인식한 그 다음에, 보다 깊고 바람직한 의미로서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 관련하여 그분은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고요해짐을 뜻한다. 안연히 처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열린 마음을 뜻하고 민감한 영혼을 뜻하며, 어린 아이같이 늘 배우려는 마음을 뜻한다. 거기엔 마음과 생각고 영혼 그리고 몸까지 모두를 온전히 그분께 내어드리는 것이 뒤따라야 한다.
기도는 늘 그분 곁에 거하는 사람, 그분께 가장 가깝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겐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겐 끊임없이 기다려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겐 의지를 굴복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그 뜻을 수행하기 위해 늘 준비되어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5. 기도ㅡ세계의 구성요소
우리는 이제 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힘들이 어떻게 우리의 필요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터득하기 시작하고 있다. (한 예로 전기)
지식의 개발은 물질적인 것들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영적인 역학 또한 더 잘 이해해야 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주제이다. 그리고 기도는 이때까지 우리 선조들도, 우리들 자신들도 알지 못했던 가능성들을 품고 있는 하나의 역동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좀더 온전하게 알게 되는 그때에 모든 것은 타당하며 적절한 것으로 드러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일을 이루어내며 열매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결실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6, 기도ㅡ하나의 과정
우선 아이디어가 있고 다음 표현이 있으며 그 후에야 구체적 구현 혹은 물질화가 뒤따른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는 사고와 실현 사이에 오는 표현인 것이다. 기도는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라 할수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현질서를 제정하실 때 그분을 말씀을 통해 그리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을 운행하시니라(창1:2)" 맨 먼저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 그 다음 하나님의 목소리가 있었다.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 먼저 수면에서의 숙고가 있었다. 먼저 이 세상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그 다음에 표현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실현이 있었다. "그대로 되니라." 비전이 구현된 것이다.
아이디어, 목소리, 그리고 실현.
하나님의 목소리는 오늘날도 인간의 귀에 들려져야만 한다. 인간만 위대한 아이디어를 품고 그것을 기도로 표현하며 그후 위대한 실현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역시 목소리를 가져야만 한다.
여러분과 내가 기도에 이끌림을 느낄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갈망하고 계신 것이다. 깊이를 다 알수 없는 하나님의 생각들ㅡ그분의 갈망들ㅡ이 여러분과 나, 이토록 불완전한 통로를 그 표현의 방편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뜻을 따라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께 완전히 종속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사실 위에서만 기도는 실제적인 일들에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으로서 정당한 위치를 점할 수가 있게 된다.
만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신 약속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 인간이 엄청난 능력의 자리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엄연히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다. 그것은 우리를 만물의 영장의 자리로 이끌어 주시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손안에 무한한 능력을 가져다준다.
기도란 연약함의 표현이라고 종종 이야기들 한다. 그러나 사실은 기도란 능력과 권위의 행사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겸손해져야 하는 때,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굴복시켜야 하는 때는 바로 우리가 우리 영광의 최고 지점에 이르러있을 그때이다.
분명 여기엔 영광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왕이요, 제사장이다. 높임받는 것과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 이 둘이 우리의 한 행위 안에 동시에 강조되는 것이다.
7. 왕과 제사장
주님은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원하는 대로! 즉 여기엔 하나님의 뜻과 어울러 인간의 뜻도 개입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구해야 하며 낮아져야 한다. 얻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간청하는 자의 자리에 있다. 당당히 요구하며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간구하며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책임을 감소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증가시켜 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 손에서 주도권과 행동을 빼앗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에게 믿고 맡기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프로그램을 짜고 우리가 세부사항을 풀어가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자유로운 손을 갖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 짜여지는 것이라야 하며, 그 한계는 곧 '하나님이 뜻을 좇아서' 라는 한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속으로 하나가 되어 녹어져 들어가는 그런 신비로운 관계라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 그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바램을 추구해나가도록 기꺼이 우리를 자유롭게 놓아주신다. 그러나 실은 그 바램은 애초에 그분의 바램이던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위대하신 목적은 우리로 완전한 사람, 다스리고 판단하며 정복하는 왕이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로보트로 깎아내리려는 뜻이 기분께는 전혀 없다. 그분은 정반대로 우리를 그분의 자녀, 그분의 대리자로 끌어올려 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행하며 그분의 목적의 실현 그 자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책임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결론에 도달하고, 프로그램을 결정하며, 주도권을 쥐고 행하며, 꾸준히 추진해나갈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우리는 의지의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왕과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태도에는 언제나 온유오 겸손의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겸손한 심령을 소유하게 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실 수 있고 우리 안에서 고요하고도 온전한 확신 가운에 일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모본을 좇는 바램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분의 생각을 좇아 생각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을 통과하여 갔을 그런 갈망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임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평온한 확신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우리는 왕의 신분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단지 간구자로서가 아니라 이미 자신이 자비를 얻은 자심을 알고 있는 자로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 자비를 나누어주는 은혜로운 사역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제사장으로서 행하게 될 것이다. 왕과 제사장!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주는 사람!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능하신 은혜의 빛을 우리의 심령에 가득 품어서 이제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비추어주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듯 기도란 한낱 먼지와 재같은 일이 아니라 흠잡을 데 없는 왕의 일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장 낮게 엎드릴 때, 그때가 우리가 가장 높이 들려올려지는 때이다.
크리스챤은 자신의 이 막중한 위치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인식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신뢰와 놀라운 기회를 위임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2-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너희가 나를 택한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5:7,16)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16:23)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교회의 일들과 이 세상 전반의 일들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위임하셨다. 우리는 보좌 위에 않은 왕과 같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짠 프로그램, 우리가 내린 결정들을 좇아 인간의 일들을 운영하신다. 그분의 위대하신 뜻이라는 노선에 들어서있는 우리는 이제 모든 능력의 핵심이 되어있다. 하나님은 지렛대를 우리 손에 쥐어주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여기엔 인간이 아닌 분의 힘이 필요하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지혜이며 우리의 모든 충족이시다. 이제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그 보좌 위에 오를 수 있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또 나눠주는 일에 있어서 명실공히 그분의 왕과 제사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8. 표현 찾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도대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인생을 그렇게 소리없이 살다가 소리없이 떠나간다. 그들의 참 존재는 그늘에 가려져있는 채로 말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는 사실 그렇게 침묵 속에 남아있을 수가 없다. 우리 속에는 뭔가 말을 하시 위해 싸우는 힘이 들어있다. 그래서 최소한 비언어적인 방식으로라도 우리는 표현을 찾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참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비교해볼 때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하며' 살고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성장에 있어서 표현이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나무가 건강하게 제수명대로 살 수 있으려면 잎과 열매를 통하여 자기를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사람도 계속해서 사고하고 계속해서 꿈을 지닐 수 있으려면 자기의 아이디어와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하며 실제적인 결과를 얻을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중요시 여기는 것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현을 찾아야만 한다. 한 사람이 미칠수 있는 영향력이 실제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개성의 명확한 표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모든 인간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장치를 고안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 최고의 업적가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금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형질을 아신다.
기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표현이 기회인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다.
동료인간을 향한 표현 또한 그것만의 독특한 자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들어주는 상대가 하나님일 때만큼, 표현이 지니는 가능성을 그만큼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기도에 있어서, 그 기도하는 영혼에게 반응해오는 환경이란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지고의 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하여 영혼은 그 지고의 선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영혼은 그분께 노출되게 되고 그분은 삶과 활동의 모든 지점 지점들을 일일이 만져주신다. 즉 빚으시고 고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그분의 능력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노출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영향력도 더욱 민감해지게 되고, 감찰하시며 변화시키시는 그분의 일하심은 더욱 철처해지게 된다.
인간의 쪽에서의 포현은 바로 하나님 쪽에서의 만지심을 뜻한다. 하나님의 만지심이란 바로 새로운 에너지, 새로운 방향, 새로운 갈망을 뜻한다. 이 만지심은 다시 표현을 요구하게 된다. 즉 우리를 더 많은 기도, 더 많은 노출로 이끌어주며,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만지심의 기회를 드리게 해주는 것이다. 일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만지심을 입게 되면 그것은 다른 바깥을 향해서도 표현을 찾아야만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람에게 먼저 표현을 하려 들지만,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영적인 순서는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 표현한다.
둘째, 하나님의 만지심을 입는다.
셋째, 동료 인간들에게 표현한다.
그리고 네번째, 동료 인간들에게 영향을 준다.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능력. 이 능력은 자기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만지심을 입은 사람에게만 참으로 주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입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귀에 자신을 얼마만큼 표현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단지 생각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포현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것도 최대한의 세부적인 방식으로 그리한다. 설교는 동료인간들에게 나의 가장 깊은 자아가 어떤 존재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한다는 것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인이다. 또한 영향이라는 것은 반사성을 갖는 것이다. 즉 하나님만 우리에게 당신의 영향을 미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기도에로 부르심은 우리 또한 그분에게 우리의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즉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의해서 당신의 행동을 정하신다는 말씀을 분명히 하고 계신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갈망이나 내면의 자아에 대한 우리의 표현이 하나님의 애정과 뜻에 영향을 주어서 그것게 의하여 그분의 행동이 정해진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기도란 세상을 움직이는 분의 손을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격언은 과연 진리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분은 지선이시며 완벽하신 분이시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사고의 산실속에 같이 들어와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단지 사람들을 향하여 왕과 제사장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영존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그분, 그러면서도 허리를 굽혀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그분을 향하여 모사의 자리에까지 들어와 있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모사의 자리로 나가가게 해주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결정의 참여자가 되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동료 인간들과 주고받는 영향또한 반사성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의 사고와 내면적 자아가 바깥으로 표출이 되게 되면, 그것은 다시 그 사람 자신에게로 반응을 가져온다. 그의 사고와 그의 자아가 바깥에서 만나는 그것들이 바로 그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만일 이런 과정이 기도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의 울타리로 둘어져있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위험하다. 내면의 영혼과 바깥 세상과의 관계는 기도라는 커다란 법정 안에서 결정되어야만 하는것이다.
9.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기도에는 이중성이 있다. 기도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이11:27). 또한 기도를 통하여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영역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보이는 것을 취하여 내면의 성소 안에 가져다놓는 요인, 그것은 하나님의 격상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세계속으로 이끌어 간다. 기도하는 사람은 왕과 제사장으로서 그것을 가지고 그곳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갈 때 그는 곧 그것을 통치하는 영역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것들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섬심을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물질적인 것은 영적으로 바뀌게 된다. 나는 인간으로서 물질과 접촉하게 되며 그것은 내게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갈 때 그것과 나의 관계는 바뀌게 된다. 이제 청중실 안에는 둘이 아니라 셋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다.
나 자신이 있다.
내가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 혹은 나의 생각의 주제,아이디어,바람이 있다.
즉 그 사람들과 상관을 맺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함께 그들과 상관을 맺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 뿐만 아니라 나와 연합해 계신 하나님과 상대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만큼 그들의 행동이 통제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이제 나를 이전처럼 연약하고 쉽게 무너지는 존재로 보지 못할 것이다. 영원하신 힘이신 하나님이 나와 손을 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이전처럼 어리석은 존재로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지혜로 나를 돕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전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보지 못할것이다. 이제 그들을 행한 나의 태도는 하나님의 태도와 똑같이 사랑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나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긍휼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다가오는 그들의 영향력 또한 통제된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그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그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우리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나쁜 뜻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을 향한 우리의 관계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마5:45) 하나님의 그것과 똑같아지게 된다.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 그 표현의 대상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도 그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적이고 심리학적인 방식으로만 접근하는 것이다. 표현된 사고와 갈망이 기도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기만 하면, 이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전혀 새로운 요소가 개입하게 된다. 이제 기도는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말이 된다. 기도응답을 받는 다는 것은 완전히 인간 성취의 영역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을 향하여 드러나기 이전에 우선 기도를 통하여 그분 앞에 세세히 표현되어야만 한다. 사람들,세상,마귀,육신,성공,야망,그리고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향한 우리의 관계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만 하며, 관계가 맺어지기 이전에 이미 그분의 능하신 만지심과 결정적인 손길의 다루심을 입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기도란 외면의 삶을 내면의 성소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영역과 영향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위대한 변화선상에 있게 되는 것이며, 하늘과 땅에 속한 주님의 비밀들이 그에게 속한 것이 된다.
10.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믿음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마음의 조작이 아니다. 참된 믿음이란 진정 존재하는 것을ㅡ그러나 믿음이라는 내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것을ㅡ인식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믿음의 눈으로 보면 내적인 것들도 너무나 명백히 존재한다. 물질적인 것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께 치료를 받은 소경들 가운데 한 사람은 마치 사람들이 나무가 걸어다니는 것 같이 보인다고 말했었다. 이건은 단지 과도기에 불과했다. 그는 잠시후 젊은이의 총총한 눈으로 모든 것을 뚜렷이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회복해 주신 시력은 부분적인 걱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크리스챤들은 보이지 않는 영역 속에 살고 계시는 주 예수님을 분명히 보고 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일부러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정작 만들어내야 할 것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시력이다.
앞에서 우리는 기도의 객관적 행위를 물질적인 대상들과 연관지어 생각해보았었다.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 어떤 사고에 대해서 기도를 하게 되면, 그것은 곧 그 대상을 내면적이고 영적인 생활의 영향권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고, 또 그 영적 세계에서 작용하는 힘 밑에 그 대상을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 물질적인 것을 거기로 가져가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사고와 마음 또한 거기로 가게 되며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영향력엔 지각력이 갖춰지게 된다.
이렇게 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 실체가 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지각의 기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거늡남이고, 위로부터 나는 것이고, 성령으로 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적 시각은 영적 생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시력이 있을 수 없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단지 사실 뿐만 아니라 인식하고 알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영적시각은 영적 생명을 좇아서 나오게 된다. 속사람이 강건해짐에 따라 그들은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의 영역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이 물질 세계의 지나가는 것들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더 실체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생명이 커갈수록 더 잘 보게 된다.
더 커다란 비전을 가지려면 더 온전한 삶을 알아야만 한다.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더욱더 하나가 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곧 성령의 세계 안에 산다는 것이고, 성령의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며, 성령의 힘을 행사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서야 할 자리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에서 물러나 참된 본향, 성령의 나라에서 쉬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우리를 거리로 데려다준다. 그것은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편안히 머무를 우리의 집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참으로 즐겨야 한다. 그것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땅을 사는 동안 보이지 않는 세계가 늘 우리와 함께 하여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천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단지 우리가 기도하는 그 대상들을 수정해주는 것만이 아니다. 기도는 단지 객관적인 힘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바로 우리를 수정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하늘의 영역으로 데리고 간다. 기도가 하는 가장 위대한 일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속에 영적인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새 세계를 창조해주며, 또한 그 새 세계에 맞게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준다. 크리스챤의 마음이 사모하는 것, 하늘을 향한 생각, 비전, 기쁨, 볼수 있는 눈과 섬길 수 있는 능력 들 이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열쇠를 기도가 갖고 있다. 우리 주님과 같이 우리도 그 기도를 통하여 이미 '천국에' 거할 수 있다.
"주님, 저에게 비전을 주옵소서. 주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옵소서. 그리하여 저로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해주시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주님을 섬기게 해주옵소서. 아멘."
11, 기도의 하나님 쪽 측면
기도는 종종 아주 이기적인 것으로 취급되곤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방법은 무엇인가? 그러나 기도엔 또다른 측면이 있다.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참으로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자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진귀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자 한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이다. 내면의 골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영혼을 쏟아 놓을 수 있는 사람을 얻기란 참으로 진귀한 일이기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애타게 찾으신다.
우리의 필요와 시건의 진상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며, 바로 그분이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를 앞에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신 뜻과 목적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될 때에 우리의 기도는 바로 그분의 기도가 된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이제 그보다 더 나아가 기도에는 한층 더 인격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이 우리의 말을 너무 듣고 싶어하시기 때문에,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본분을 더 깊이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고, 그럼으로써 기도가 우리와 그분과의 연합을 더욱더 실감나는 것이 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분께 더욱더 가까이 붙어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그분의 마음으로서는 대환영이다.
그분께 있어서 사람의 간구의 목소리는 그분의 거룩하신 제단 앞에 피어오르는 향기로운 향내음과도 같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8:3-4).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계5:8). 아버지의 마음의 굶주림은 그의 자녀들이 그분께로 향하여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을 일심으로 의뢰하는 것을 볼 때에 씻은듯이 가시게 된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의 마음은 주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나 그 주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심령의 잠자던 성품들을 일깨워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간 우리와 가장 가까워야 할 분,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분으로부터 얼마나 숨어져왔던가! 인간의 영혼과 그분 자신 사이에는 아무런 제한구역도 있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제한 구역을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을 깨뜨려야만 한다. 기도가 바로 이런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가면을 벗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나아가는 것, 인간의 제한 구역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자원하여 전적으로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오는 것은 그분을 얼마나 흡족하게 해드리는 것이겠는가!
우리가 기도하는 데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며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로 연합될 때 그분은 그 연합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놀랍도록 풍성한 것으로부터 내어주실 수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축복은 바로 당신 자신이며, 그분은 또한 우리로부터 '우리 자신을' 받으신다.
기도는 하나의 신비로운 행위가 된다. 그것은 단지 구하고 내주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인 축복이나 영적인 축복을 구하고 받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써 사랑이신 하나님이 다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이며, 그 반응으로 경배와 순종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받으실 만한 것 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정말이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모든 것을 그렇게 정해 놓으셨다.
사랑은 기도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기도의 길잡이이기도 하다. 사랑은 선물을 주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들이 필요를 표현해오는 그 목소리를 듣기를 갈망한다. 영적으로 죽어있을 때는 침묵 속에 잠겨 있는 그 목소리가, 이제는 천국의 언어를 말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사랑은 서투른 혀짤배기 발음을 듣는 것을 기뻐하며, 사랑은 또한 점점 온전해져가는 표현을 듣기를 기뻐한다. 사랑은 듣는 걸 매우 기뻐하기에 상대로 하여금 조금씩 더 이야기하고 점점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힘을 불어넣어준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자녀의 목소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사람의 목소리가 될 때까지 꾸준히 그를 인도해 주신다.
12. 하나님의 영역의 확장
하나님은 태양이 가는 길을 정해 놓으신 것처럼 당신의 은혜가 나아가는 길 또한 정해 놓으셨다.
그분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인간이 되셨다. 그것을 통해 그분은 위대한 진리 하나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 진리란 이전부터 언제나 있어온 것으로써, 즉 하나님은 사람을 대하실 때 그들이 있는 차원으로 내려오신다는 것, 당신의 행동을 사람의 기질과 사람의 내적 한계에 부응하도록 제한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일반 원칙이다. 하나의 우세한 세력이 개입해 들어오려면, 언제는 그것은 그 개입의 통로가 되는 존재의 본질과 역량에 상응하는 그런 입구를 찾아야만 한다. 이것이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방식에도 자연스럽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좁아진 것은 그분안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이다.
이렇듯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다루심에 있어서 그분은 당신 자신을 인간의 기질과 역량의 수준으로 제한하셔야만 했다. 이제 크리스챤의 영광은 이것이다. 즉 크리스챤은 역량의 확장을 경험하게 되며 따라서 자연인 상태에 있을 때보다 훨씬 크고 효과적인 하나님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띠까지는 상대적인 이야기이다. 사실은 오직 새롭게 함을 입은 자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로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행동을 방해하는 여러 제한들을 제거해버리거나 최소한 감소시키게 된다. 이제 하나님은 한 사람의 새롭게 된 심령과 삶을 통하여 또는 그런 사람들의 몸을 통하여, 달리는 할 수 없는 더 많은 일들을 행하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하나님께 간구하며 나아오는 겸손한 영혼은 지금 자기가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그 사건이나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져주실 수 있는 차원에다 끌어올려 놓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가로막는 장대물들이 너무 많아서 그분의 은혜가 그 바라시는 대상에까지 이를 수가 없다. 여기에 기도가 끼어들게 된다. 기도는 그 사람들이나 그 대상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필요함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로 하늘의 뜨랏, 하나님의 속죄소(은혜의 보좌) 앞으로 끌어올려 놓는다. 이제야 비로소 그것들은 하나님의 손대실 수 있는 자리에 와있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손대기가 너무 어려운 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향권 안, 위대한 은혜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란, 그분께서 그분의 위대하신 뜻과 목적을 수행하시도록 그분께 기회를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낮고 비천한 것을 아주 단순하고도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바로 갖다놓을 수가 있다. 그리하여 그분의 임재가 비추어내는 영광스러운 빛이 우리의 그 기도 대상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우리의 환경들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올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아침에 출금하면서 같은 차를 타게 된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에게 관심을 가지며, 우리의 마음을 들어 그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젊은이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바로 데려다 놓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모두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올려 드린다. 그리하여 그들을 위한 더욱 큰 가능성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우리가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대해 보다 희망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분량을 좇아 사도 바울고 같이 '가난한 자 같으나 않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자'라 고백하게 될 것이다.(고후6:10)
그런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를 향한 당신의 위대하신 사랑을 훨씬 더 온전하게 실현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드린다. 우리는 그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보다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다.
13. 기도의 정신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니며, 우리 손으로 만질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저 너머'에 있는 것을 상대하고 있으며 믿음의 구사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해 보인다. 물질적으로 내 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영적인 존재보다 훨씬 커보인다. 바깥 세상의 소음이 내면 세계의 속삭임보다 훨씬 잘 들린다. 재빠즈레 회전하는 생의 울림들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심령이 들려주는 말들보다 더 우위를 차지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를 애쓰는 사람, 기도의 예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부딪치는 커다란 난제이다.
어려움이 실제적인 만큼 해결책 또한 다분히 실제 상황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성령의 속삭임을 차단하는 것이 바깥 세상의 소음이라면, 반드시 확보하고 개발해야 하는 것은 바로 고요한 환경이다. 우리의 마음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기술을 배워야한다. 자신의 내밀한 성소 안으로 물러나 침잠히 있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물어나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성소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자기의 존재의 맨 밑바닥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만일 거기서 드러나는 자아가 열에 들떠 안절부절하고 있는 존재라면 그의 기도는 어느만큼은 이 부산함에 의해 영향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기도의 정신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기도할 때 사실 우리는 우리라는 사람의 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취해보지 않았던 아주 낯선 태도를 취하려 하는 것이다. 하루의 매순간을 기도의 정신 속에서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특별히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그 기도의 기간들을 활용해여 모든 일상사들을 우리 삶의 궁극의 원리들 밑에 갖다놓는 그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고요함을 자꾸 개발해가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묵상이라는 것이 커다란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때 우리에게는 커다란 자유가 주어져있다. 하지만 그분께 나아갈 때 우리는 온전한 의식 속에서 전심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만일 우리의 심령이 우리 안에서 불타고 있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급절한 필요를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보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기도 제목들을 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제목들을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그리고 그 제목들에 의해 나 자신이 충분이 영향을 받은 뒤, 그세어야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충분히 영향을 받지 않은 사태에서 하나님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드려야 하는 것은 기도만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되 우리의 생각과 함께 드려야 하며, 그 기도 속에 우리의 존재 자체를 담아서 드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간구는 우리 자신을 일부러 내어드리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와 간구가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것은 마음과 생각이 문제의 그 필요 위에 머물러 그 필요와 함께 어우러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될 때에야 우리는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란 곧 우리 자신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4. 쌓아두는 기도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20)
우리는 흔히, 필요가 생기면 기도를 해서 거기 필요한 은혜를 충분히 얻으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이것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의 실존이라 아니할수 없다. 그렇게 해서는 영적인 백만장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에 과거의 축적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자본이 결합될때 비로소 물질적 진보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쌓아두신 엄청난 자본이다.
우리에게 많은 보물과 영향을 남겨준 사람들이 있다. 거기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잇으며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앗으며, 하나님의 귀에 간구를 울리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 기도들을 유업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행동에는 제한이 없었다. 즉 행동의 결과는 무한한 것이며, 거기엔 어떤 제한도 가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 자본의 축적은 대개 자녀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 자신에 관한 야망은 점점 내어버리면서 이제는 자녀들에게만 모든 야망을 내건다. 자녀를 위해 취선을 다하고 싶은 것은 부모에게 있어서 하나의 터다란 열망이다. 그들은 점점더 노력하게 되며, 돈을 투자한다. 그리하여 젊은 세대들은 성공을 위한 모든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으면서 인생을 출발하게 된다.
내면적인 진정한 삶의 경우는 어떠한가? 외부적인 것들은 가 공급되면서도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들은 채워지지 않아도 괜찮은가?
한 아들이 대학에 간다고 해보자. 아버지가 기도로 아들보다 먼저 그곳에 가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또한 딸들도 마찬가지이다. 딸들이 혹시라도 이단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아버지와 어머지가 막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여자들이 내 딸처럼 예쁘고 순진했지만, 이런저런 적들에게 끌려가버리고 말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부모가 그 딸들을 전능자의 보호 아래에 두지 않아도 되겠는가?
여기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기회가 주어져있다. 기도는 현재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며,나아가 미래를 위한 잠재 에너지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의 삶도 우리를 앞서간 사람들의 기도로 둘러싸여있으며, 우리들 중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기도가 적용되는 것은 비단 우리의 후손이나 교회나 미래의 사람들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왜 우리는 언제나 방어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꼭 적으로부터 공격이 있을 때에만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단 말이가? 기도의 전선은 우리를 견고하게 서게 해주고 적의 참입을 막아주는 안전지대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공격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물러가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때 닥쳐오는 일들에 대해서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이 되자. 주님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공격군이 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두자. 우선 이 공격이 은밀한 골발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자. 그 다음에 정찰대를 내보내자. 적의 상활을 탐지해서는 것을 우리의 군대장관인 주님께 보고해드리자. 적이 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적의 전진을 차단하고 나서자.
우리에게 쌓여진 심령의 힘과 축적된 영혼의 부요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져야'(눅12:21)하는 것이다. 우리가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때, 그리하여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부요 위에 부요, 힘 위에 힘을 부어주실 수 있도록 해드릴 때, 우리는 그렇게 부요해질수 있다.
15. 기도 학교에서
하나님은 뒷전에 계시는 듯해도 결코 늦는 법이 없으신 분이다. 무관심해 보이는것 같지만, 실은 훨씬 더 멀리까지 내다보시는 분이시다.
성령의 어떤한 자유도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내주하시는 임재의식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쪽에는 결코 마음이 변해버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분은 언제나 그 자녀들을 축복하기를 열망하고 계시며, 그것은 그들이 그분께 나아가기 전부터 이미 그러했다.
은혜의 보좌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서 우리의 심령은 이것을 깨닫게 된다. 즉 우리의 작고 연약한 갈망은 실은 모든 세대의 충족이 되시는 사랑이신 그분의 위대한 갈망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기도는 마음을 살피는 일이 된다. 점점 더 듣는 법을 배우게 된다. 심령에는 평온함과 잠잠시 바라는 마음이 찾아들게 된다. 이제 자신도 모른 사이에 매사에 성령깨서 친히 앞서가시기를 원하게 된다. 기도에 있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제 어떤 목적이나 기도제목에 대하여 한 줄기 빛과도 같이 새로운 계시들이 찾아오게 되고, 그에 다라 기도자의 마음은 조명을 입게 된다.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우리가 희생을 통하여 서로간에 연합도록 부르신다는 사실을 터특해야 한다. 연합이란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소모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아에 대한 내성과 주장의 성향이 있다. 이것은 시선을 자기 내부에 돌릴 때 더욱 드세진다. 그렇데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온전하신 자기 소모자이신 그분고 연합하게 될 때에 우리의 그 성향은 강한 반대 세력에 부딪히게 된다. 기도는 희생을 낳는다.
희생이란 넓은 터에서 시작하여 점점 내밀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외면의 삶에서 시작하여 마음의 뜽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위대한 복종은 겟세마네에서 이루어지며, 그뒤에는 자연히 갈보리가 따라오게 된다.
영적인 대화가 점점 풍성해지게 되면, 우리 안엔 희생의 정신이 점점 자리하게 되며 우리는 그것을 기뻐하게 된다.
주님은 우리를 희생으로만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기쁨과 충만, 그리고 내주하는 평안을 주신다. 우리는 그분의 뜻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며, 그분의 인내와 견고함을 배우게 되고, 우리 자신을 기꺼이 그분의 뜻의 도구로 내어드리게 된다.
새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인간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희생과 섬김이 이른바 제2의 본성이 된다. 그의 영혼은 섬기기를 원한다. 그리고 갈보리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기쁨이 이제 그대로 그 종의 기쁨이 된다. 그 역시 주님을 따라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며' 주님의 자기 포기를 그대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고난을 허락하신다. 세상은 그걸 보고 왜 그분이 개입하시지 않는 것냐고 묻는다. 그분은 언젠가는 그리하실 것이다. 그날 이 모든 고난은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은 내면의 생활에 초점을 맞추시며, 감당할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그 내면 생활 속에서 주님은 고난받는 자와 하나가 되시며, 그 갈라진 상처들 위에 은혜의 기름을 발라주신다.
16. 공동체의 기도
기도는 우리에게 있어 시민법보다도 더 엄격한 것은 영적인 법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나라의 관리들보다 훨씬 차원높은 순결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우리가 몸이자 동시에 영혼임에도 물구하고 영혼은 늘 몸을 대항하여 싸우고 몸은 늘 영혼을 대항하여 싸운다. 그리스도는 그 둘을 다 구속하였다. 이제 혼신된 몸은 영혼의 종이 된다. 몸은 종이라는 제잘를 늘 시켜야만 한다. 교회의 조직도 구속받아 성화된 몸이다. 그러나 여기서 역시 마찬가지로, 조직도 구속받아 성화된 몸이다. 그러나 조직은 모다 낮은 위치에 머물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늘 지배적인 세력으로 군림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기도가 교회를 낮아지게 해준다. 형태가 중시되지 않고 겉모양이 중시되지 않으며, 일반대중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해준다. 이는 힘의 선포다. 승리하는 교회, 영향력있는 교회는 곧 은혜의 보좌 밑에 엎드려있는 교회이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이 영향력을 알아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 영향을 자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영향력이 있어 바깥으로 흘러나간다면, 세상을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 자기를 표현할 뒤에야 사람에게도 자기를 표현할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영향을 받은 뒤에야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실체로 나아가야먄 인간들에게도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다. 사실대로 다 밝혀질 것이다. 위부에 드러나는 것은 내부의 반영지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승리의 삶을 구하고 찾고 기뻐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구하되 크리스챤 공동체의 전체 몸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다. 우리또한 자신의 영적 유익보다 교회를 더 먼저 생각해야 하며, 교회가 깨끗게되고 거룩하게 되기를 사모해야 한다. 합심기도는 개인 기도들을 모아놓은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불길이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이 불과 저 불이 서로서로 맞닿아 마침내 온통 불바다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7. 온전한 확신
크리스챤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뢸 때 온전한 확신 속에서 간구해야만 하며, 심령에 영원한 안식을 누려야만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을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히라"(요14:13)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를 굉장히 강조하시고 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할 일을 우리가 대신 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혹은 그분의 제자라고 고백하면서 그에 합당치 않은 일을 행할 때, 그것이 그토록 끔찍한 일이 될 스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일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욕된 자리로 이끌어내리는 자가 되거나, 아리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떠나셔야만 하거나..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헛되어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다면 그것도 잘못이다. 아버지의 명예로운 이름을 달고 다시는 아들은 그 이름을 사용하슨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주님은 당신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계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그런데 그분께는 항상 불변하는 규칙이 하나 있다. 바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를 원하시지 않는 기쁨이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그 이름,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빌2:10-11)하신 그 이름, 바로 그 이름과 그 영광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함께 나눠갖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이 말은 곧 이런 뜻이다. "너희는 마치 내가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하라. 나는 하늘에 있고 너희는 땅에 있다. 그러니 너희가 내 대신 기도하라. 나로 너희를 통하여 기도하도록 허락하라. 나는 인간의 축복을 위하여 간구하기를 진정 원한다. 너희는 나의 입술이 되어다오. 나의 이 간절한 열망을 말로 표현해주는 입술이 되어다오." 그리고 그분은 약속하신다. "너희가 기도하면 내가 그 기도를 받아서 내 기도로 삼겠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가겠다. 아버지는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기도에 대해서 우리 심령에 확신을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분이 자격을 갖고 계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그분은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는 자, 즉 이 일을 위하려 정함을 입으신 분이시다. 그 분은 자격이 있으시다. 온 세상의 구속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격이 있으시다.
이것이 내 안식이요
그 안식이 참으로 좋으니
이제도 그 안에 거하히라.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자리는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멋모르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기도의 근원지가 결코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우리는 보조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겸손하고 단순하게 오직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그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분의 바라시는 바가 우리 속에 적셔들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보조자로서 그 바램들을 가지고 가 기도로 올려드린다. 하늘에 계신 그분에게까지 닿을 수 있도록 이땅의 분량을 '채우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분께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땅의 계곡에는 그분의 겸손한 동역자들이 있다. 그분은 그들의 손에 당신의 일을 맡기셨다. 이것은 결코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땅에서 행해지는 그리스도의 일인 것이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확신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다는 것, 그것은 내 기도를 포기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기도를 주님의 뜻이라는 고고한 물결 위로 떠올려 줄 것이다. 삶의 모든 부분이 다 그러하듯이 이제 기도에서도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시다." 즉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하여 기도하시는 이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 주여, 주만이 나의 구원이 되셨나이다."
18. 소모와 재충전
우리의 확신에는 한 가지 위대한 근원이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첫째, 기도에 관한 약속들이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마7:8)
"쉬지 말로 기도하라."(살전5:17)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마7:9-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돌보심)이니라"(벧전5:7) 등등..
둘째, 구체적인 필요에 관한 약속들이다. 교회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주께서 일어나사 시몬을 긍휼히 여기시리니."(시102:13)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물질적인 문제가 어려움이 되고 있는가?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 우리의 평안을 위협하는 것이 죄의 세력인가? 약속이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과거의 죄의식이 되살아나고 있는가? 다음의 약속이 우리를 평온하게 해준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시103: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확실한 약속인가! 그리고 어떤 경우에 처해있을지라도 그것은 우리 심령에 얼마나 견고한 확신을 주는가!
셋째, 기도에 있어서 말씀이 담당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활을 우리를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연합 속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경건한 영혼이라면 성경 어느 부분을 묵상하더라도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더 깊은 연합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영적 씨름의 시기를 가장 훌륭하게 마감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아름다운 약속을 주장하면서 잠시 동안 성령의 부드러운 안식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경우의 약속이란 기도를 자극시켜주는 그런 약속이 아니라 우리를 보존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신 약속이다.
이제 우리에겐 마음에서 뿐 아니라 입술에도 노래가 있게 될 것이고, 우리는 주님안에 머무르는 자에게 온전한 평강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안에서(사26:3) 고요히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보존의 약속이 아예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기도에 힘을 주었던 묵상들의 향기가 기도가 끝난 뒤에까지도 이어져, 우리의 발길이 분주한 일상의 장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계속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민감한 영혼은 주께서 행동하시기를 원하시는데도 기도에만 머물러있으려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도 자체가 아니다. 성령과 우리 사이의 내적 연합이 지속되어야 하며, 그 절대적인 통제는 한시도 예외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내면의 생확은 외면의 삶을 통해 진가를 드러내게 된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 우리를 행동으로 부르실지, 그 신호에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내면 생활을 가꾸는 일이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참으로 값진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의 순종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내면과 외면 둘다의 주인이시며, 영혼과 육체 둘다의 주인이시다. 모세는 광야에 은거하면서 내면 생활을 가꾸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서 그것 이상의 것을 원하셨다. 이제 내면 생활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알게 된 모세에게 하나님은 바깥으로 나가 지도자가 되어 활동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는 중 마음 상태가 변하는 것 같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더 간절히 깨어서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해야 하며 그분의 뜻에만 순종하고자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위에 서는 영혼, 그분의 섬세하신 인도에 늘 깨어있는 기술을 터득한 영혼, 그에게는 어디를 가나 풍요로운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19. 신비로운 기도
늘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어지러운 생각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놀라우신 성품들에 마음을 두어라. 처음엔 마음이 게을러지는 것 같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엔 불이 붙기 시작할 것이다.
시작할 때는 바짝 긴장하여 노력해야 하지만, 나중에는 그 과정이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 같지 않고 내 안에 이미 붙어있는 그 불로부터 나오는 것 처럼 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 기도에 해당한다. 영혼이 세상을 등져야 하는 특별한 시간들에 해당된다. 영혼이 하나님을 구하며 그 임재 속에 들어가 그 안에 계속 거한다는 것은 처음엔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욥23:3). 이것은 갈급한 심령의 간철한 외침이다. 그러나 후엔 연합의 띠가 형성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제 영혼은 더 이상 주님을 찾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분을 찾았고 이미 그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달콤한 연합 속에 계속 거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 된다.
이제 기쁨에 찬 태평한 상태, 전혀 염려가 없는 상태가 찾아온다. 책임을 이전 못지 않게 여전히 크고, 필요 역시 이전보다 훨씬 절박하게 느껴지지만, 그 필요는 더 이상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슈들을 다 왕되신 주님께 속해져있으며 모든 것은 그분의 손안에서 다 잘될 것이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4:18).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사람은 알며, 거하며, 기뻐한다. 자연스럽게 기도가 흘러나온다. 주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기도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라는 물결에 맞추어서 흘러나가고 흘러들어온다.
목적의 연합, 갈망의 연합, 마음의 연합, 행동의 연합, 고난의 연합, 기쁨의 연합, 이런 것들이 바로 주인과 종을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들이다. 기도는 갈망과 축복, 교훈과 수용, 뜻의 지시와 즉각적인 반응등이 오고 가는 흐름이 된다.
기도는 이중의 축복이다. 구한 것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받는 과정에서 주님과 신자 사이의 놀랍고도 축복스러운 연합의 증거가 더욱더 깊어져가지 때문이다.
20. 기도하지 않는 이유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그런데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은혜보다도 더 우리에게 경이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은혜의 제의를 거부하고 나서는 인간의 굳을 대로 굳어진 마음이다. 두 가지 커다란 중대 사실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적하여 죄를 지은 타락한 사람들을 향하여 아무런 대가없이 값없이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참으로 많은 인간들이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스레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15:22)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15:24)
강력한 무기가 전투의 한복판에서 쓰여지지 않고 그냥 무기고에 남아있는 것이 그저 우연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거기엔 방해제로서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유들이 분명히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두드러진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인간 내부의 불신의 악한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마음속 깊은 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바깥으로 선포된 그 약속들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실하신 성품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도에서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기도의 실행에 그렇게 약해진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고, 또 그분께서 주신 말씀들을 확신 가운데 의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때 그분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거라는 믿음 속에서 고요히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들에 대하여 요한일서에서는 아주 엄중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5:10)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곧 그만큼 말씀의 수용과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 된다. 확신이 없는 마음은 곧 거부하는 마음이다. 기도에 대한 인식이 없고 응답에 대한 기대가 없는 곳에는 곧 그리스도를 향한 불신과 거부의 죄가 있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속사람의 죄이다. 그것은 불신의 악한 마음이 가져오는 결과이다.
즉 기도 부족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분의 선포된 말씀을 신뢰하지 않으며,우리의 마음이 그분께로 머물러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굉장한 의지의 노력을 요구하는 과장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크신 마음과 생각, 즉 하나님을 향해 보다 낮은 마음과 생각, 즉 인간이 가져야 하는 태도의 자발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마음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다는 분명한 징표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기가 바로 기도생활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즉 겸손이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내적 소외를 아뢰며, 그분을 왕좌에 모시지 못했던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곧 죄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ㅡ그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ㅡ이제 우리 영혼은 다음 사실을 알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이 죄에서도 우리를 분명히 구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매일 교제의 삶 속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기도하지 않은 두번째 이유는 기도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도를 시작하는 법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기도에 있어서도 진리를 알고 그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면 기도하고 싶은 강한 동기가 조금이라고 생겨나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기도에 대한 분석이 혼돈된 생각을 참 의미로 밝혀주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책들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성경의 교훈과 실례들을 통해 직접 가르침 받을 수도 있다. 또한 성령의 직접적인 부드러운 조명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기도에 관한 진리로 이끄시는 분이며, 불타는 심령을 주시는 분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기도와 기도의 정신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고 싶은 열망과 기도의 실행은 깊은 사고를 통해서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이 위대한 일을 실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자꾸 생각해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21. 기도의 일터
우리는 최근 많은 크리스챤들의 기도관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곧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은 강단과 교단, 교실과 개인적 영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진짜 사역이고, 기도는 거기에 대한 보조물로써 따라오게 된다. 만일 그 진짜 사역이 기도로 시작되고 기도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기도는 인식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부차적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 기도관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눈으로 드러나는 사역은 모두 물질적인 것과 더 깊은 상관을 맺고 있지, 심령의 골방에서 일어나는 일과 상관을 맺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의 시간은 그것이 가져오는 축복된 결과라는 것 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일이다. 은밀한 기도의 골방, 심령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기도하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이 알 뿐이다. 그것은 보다 내면적인 일이며,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숨겨져있는 행위이다. 기도는 그것이 낳은 결과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굳이 사람들에게 선전을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아주 품격이 있고 훌륭하지만 겸손하여 그것을 감추고 있는 사람들과도 같이, 기도는 눈에 띄지 않은 채 그냥 숨겨져있고 대신 다른 일들이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엄연한 사역(일)이다. 그것은 숨은 사역이다. 기도하러 갈 때 우리는 일하러 가는 것이다. 여기엔 희생에의 부름이 있고, 인내와 오래 참음을 구사해야 할 기회가 있으며, 높은 이상과 끈질긴 씨름의 여지가 있다. 겟네마네는 갈보리 못지 않게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위대하신 뜻을 다 이루신 곳만큼이나 그분이 기도하러 가셨던 그곳도 필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교회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는 그들에게 보낸 그의 서신들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다.
이제 많은 크리스챤들은 영적인 힘의 가치에 대한 견해를 수정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강조점이 다르다. 이제는 시작부터 기도로 시작하자. 시작이 기도 안에 있다. 기초가 기도 위에 놓여졌다.
주일학교를 생각해보자. "오 하나님, 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가르쳐 주옵소서. 이들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 이 아이들을 주님의 임재 가운데 올려 드립니다. 우리와 이들을 함께 드립니다. 우리의 유익이 그들의 유익이며 그들의 유익이 우리의 유익입니다. 주님, 주께서 친히 놀라운 일을 행하소서."
우리가 한 아이 한 아이를 놓고 기도를 할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며, 이제 우리의 모든 가르침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가동 준비를 완료하고 계신 성령의 은혜로운 영향력의 도구로 사용되게 된다. 우리가 가르칠 떄 우리는 단지 주님의 은밀한 임재 가운데서 이미 이루어진 그 일에 하나의 보충물을 내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교, 심방과 같은 다른 일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사는 방문하려는 집들을 찾아갈 때마다 하나님을 함께 거기에 모시고 간다. 그러니 그가 방문하는 그 집에서는 먼저 가계신 하나님께서 후에 들어오는 그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은 기다리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종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가신다. 그 집의 사람들에게나 목사에게나 심방은 두 배로 축복스러운 것이 된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것이다. 즉 인생의 커다란 목표들을 하나님으 임재 가운데서 이러어가는 방법, 거기 따르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이제 드디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이미 참된 내면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바깥 세상으로 내어보내는 방법 등이다. 기도의 일터에서는 많은 것들이 만들어 진다. 바깥 세상의 시장에서는 그렇게 기도로 만들어진 것들이 사람들에게 보급된다. 골방에서 말해진 그것이 지붕 위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22. 불타는 심령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인간은 기도의 외형적 표현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속 깊은 곳을 보시며 그 안에 있는 갈망 자체를 들여다보신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라(시37:4)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마음의 상태이다. 마음이 바르다면, 그분은 입술로 말하지 않은 기도까지도 다 들으신다. 그러나 기도가 오직 말뿐이라면 그분은 아무 것도 듣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영혼의 경건한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의 행동들보다 영혼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 개개의 행동들도 영혼의 상태의 반영물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역시 후자가 더 중요한 요인이다. 믿음이 어린 크리스챤일수록 개개의 행동들과 성공, 실패 여부 등에 더 많이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를 좋게 하면 실과도 좋아질 것이다(마12:23)
영혼의 전체 상태는 열매맺는 능력의 지표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바로 기도 생활의 척도이다.
우리가 불타는 심령을 받게 되면, 이제 기도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 되며, 또한 기쁨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하게 된다. 모든 삶은 그 기준에 의해서만 가치를 띄게 된다. 이제 우리 눈에는 많은 것들이 하찮은 것으로 보이게 된다. 궁극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사실 하찮고 초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것들이 우리를 기쁘게 하기 시작한다. 그 변치 않는 내면의 가치가 더욱더 빛을 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심령이 점점 깊어질수록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바람들을 주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실 수 있는 것들로 깨끗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그 바람들은 하나의 커다란 바람 안에 중심을 두게 된다. 그것은 곧 주님 자신의 바람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이제 우리의 심령은 그분 자신을 기뻐한다. 우리의 약한 사랑이 위에 계신 그분을 향하게 되면, 그분은 하늘에서 큰 사랑으로 응답해오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커다란 바람이 되며, 그 바람은 그 어느 것보다도 온전하게 응답된다.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히11:6). 이것이 불타는 심령을 지닌 사람이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얻게 되면 이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하여 그밖의 모든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기게 된다.
주 예수께서 엠마오 도상에서 그리하셨듯이 그분은 성경을 열어주시고, 생명을 말씀하시며, 당신의 비밀스러운 뜻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우리의 심령을 더욱더 불타오르게 해주신다.
이 불타는 심령에는 끝이라는 게 없다. 연합의 달콤함을 맛본 심령은 이제 더욱더 그것을 사모하게 된다. 사랑하는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게라도 되먄, 이제 애동하는 심령으로 그것을 찾게 된다. 의뢰의 기도가 터져나온다. 그것은 더 깊고 더 친밀한 연합을 위한 부르짖음이다. 주님은 그러한 부르짖음에 결코 귀를 닫지 않으시며 마음으로 모른 체 하지 않으신다.
불타는 심령의 그 불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모든 장애물과 거침돌과 두려움을 깨끗이 태워버린다. 사랑은 사랑을 부른다. 이전엔 서로간에 불가능했던 일들이 이제는 서로가 가장 가까운 애정의 띠로 묶여져 있기 때문에 아주 일상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그러므로 진정 기도하는 자의 길을 의인의 길과도 같이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 된다.
23. 기도의 실행
바라는 것과 소유하는 것, 그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있으면 이미 반 이상은 소유한 것이다. 가능성으로 사로잡혀 있는 심령이라면 그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참으로 기도하기를 바라는 심령이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도하는 것이다.
첫째로 구하는 것.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의지와 열심과 노력으로 그 능력의 상태에 도달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정작 해야 될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기도의 심령, 불타는 심령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언제나 기도는 주님께 속한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진귀한 선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진귀하다는 것은 드물다는 의미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그것을 주해야만 한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낮아져야 하고, 기도할 줄 모르는 자신의 굳어진 심령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고백해야 하며, 주께서 우리에게 불타는 심령, 믿음의 마음, 고요한 확신의 마음, 커다란 비전의 마음, 바로 주님 자신의 그 마음을 은혜로 주시도록 간절히 구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은 주실 것이다. 기도를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그것은 그분의 거룩하신 마음과 뜻을 좇아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영을 구하라. 사랑하는 그분을 찾으라. 그러면 그분을 만날 것이다. 그분의 위대한 만남의 방의 방문을 두드리라. 그분은 친히 문을 열어주시면서 우리에게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내어주실 것이다.
둘째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에 자신을 내어준다는 뜻이다. 기도를 일삼아 한다는 뜻이다. 낙심되는 일이 있고, 응담이 더딘 것 같아 보일지라도,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결코 기도를 외면하는 분이 아니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선물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기기 전에는 그 최고의 선물을 바로 내어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를 시험하시며, 우리가 그것을 참으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기는지를 살펴보신다. 우리는 과연 그분을, 그분과의 교제를, 그리고 그분께서 능력과 은혜로 내어주시는 그 응답들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가?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는가?"(히11:26)
그분이 주시는 강력한 힘들을 우리가 구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위치를 켜야만 한다. 그러면 전력과 불빛은 그분이 책임지신다.
어느 전화 가입자가 있었다. 그런데 새벽에는 전화가 걸어지지도 앖았고 밖에서 걸어도 걸려지지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낮 시간에는 평상시처럼 전혀 이상 없이 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과 새벽에는 전혀 불통이었다. 담당국 기사, 부서 총책임자등 여러번 점검을 해보았으나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 밑으로 들어가 전선의 길이를 차근차근 시험해나갔다. 마침내 문제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전선을 둘도 끊어져있는데 바깥 덮개만 보아서는 이어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지점이 있었다. 끊어진 양측 사이의 공간은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흐름을 차단하기에는 충분했다. 낮에 열이 있는 동안에는 전선이 늘어나 양쪽 끝이 서로 닿아 전류가 통했다. 그러나 밤이되어 기온니 내려가더나 아예 날이 몸씨 추운 날이면 전선이 오그라들어 서로 연결이 되지 않게 된다. 양끝이 서로 닿게 하기 위해서는 열이 필요했다.
기도가 바로 이와 같다. 이곳 땅에 있는 우리와 저 하늘과의 연결은 종종 끊어진 전선과도 같은 것이다. 그 연결에 전혀 틈이 없게 될 그날, 그것은 우리의 미래의 소망이 주는 기쁨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동안 만큼은 종종 틈이 발생하곤 한다. 우리가 '통하게' 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메시기를 하나님께 보낼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을 수도 없게 된다. 이럴 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열의 문제이다. 대화가 제개될 수 있는 심령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굳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바라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는 그분께 부정으로 대답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거짓 진리를 거부해야 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참된 진리 즉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신다는 것, 그분은 귀를 닫지 않으신다는 것, 우리가 드리는 한숨, 바람, 소원, 표현 그 어느 것도 그분께는 무용한 것이 없다는 사실 등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소중하다. 그분은 당신 자신의 놀라운 방법을 따라 그 모든 것에 다 응답하실 것이다.
이렇듯 위대하면서도 단순한 규칙이 있으니 곧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 쉬지말고 계속 기도하라. 어려서 걸음마를 배울 때처럼 비틀거려도 좋다. 마음을 굳게 먹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리고 희생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 끈질지게 계속하라. 이것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것은 사람의 얼굴을 보기 전 하나님이 얼굴을 먼저 볼 생각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 결과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이다.
성공하는 기도 생활의 두 가지 위대한 비밀이 여기 있다. 첫째는 단순한 마음, 어린 아이 같은 아음, 겸손한 마음, 믿는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둘째는 굳은 마음, 확고한 자세, 자기 희생의 태도로 계속하여 기도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기도는 더이상 단순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쭉 늘어놓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질서를 따라 흘러나오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과 생각을 또한 늘 깨어있게 될 것이다.
이런 결과가 기도하는 당사자의 개인 생활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찾아오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점점 깊이 느껴짐에 따라 심령은 더욱더 하나님께 자신은 내어드리게 되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참 안식처를 찾게 될 것이다. 이제는 더 나아가 우리의 심령이 영원히 그분의 궁정 안에 거하게 될 그날, 그분과의 연합의 문결을 그 어느 것도 끊어놓을 수 없는 그날을 간절히 사모하게 될 것이다. 성경의 약속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종등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계22:3-4)
24. 기도와 믿음
믿음의 사람이 거하는 환경은 곧 영원한 진리라는 환경이다. 그의 비전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한 비전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간다. 그 교제는 곧 기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이란 곧 기도를 뜻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만 맞닿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요소들과도 맞닿아있게 된다. 즉 그는 다른 동료 인간들 및 그들에 관계 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접촉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연결을 거룩한 연결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어서 다른 동료 인간들도 그곳으로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하여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사역의 손안에 올려놓게 되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그들 위에 내려오게 하는 것이다.
믿음은 기도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바에 대한 충분히 근거있는 확신이다. 믿음 즉 바라는 바에 대한 확신은 소망을 더욱 간절하게 해주며, 또한 확실성이라는 요인에서 비롯되는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다른쪽 한편에서 보면 기도는 믿음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믿음이 행동의 영역으로 떠오르는 데에는 두가지 통로가 있다. 하나는 기도이고 하나는 봉사이다. 이 셋의 바름 순서는 우선 믿음이 맨 앞에 있고, 중간 단계로써 기도가 있은 다음, 마침내 그 결과로써 봉사가 있게 된다. 믿음은 본질이고, 기도는 표현이며, 봉사는 결과이다.
영광스러운 삼위일체를 통하여 나타난 사역으로부터 조심스레 그 원리를 뽑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위대하신 중심이며 본질이다. 성자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표현된 형상이며 선포이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과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당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해줄 것을 요구하셨듯이, 이제 믿음도 인간의 삶 속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기도는 믿음과 행위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이다. 사도 야고보가 얘기했듯이 그 행위가 없이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미 믿고 있는 우리가 믿음의 삶으로, 그리고 효과적인 기도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주님 자신에 대한 보다 온전한 지식과 보다 분명한 이해, 그분을 바라보는 비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혼이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만나게 될 떄, 우리의 생각들이 그분을 향하게 표현될 때, 그리고 그분께서 기다리는 심령에게 당신 자신을 내보이실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의 시간을 가질 때, 그때 믿음은 힘있게 일어서게 되며, 비전은 분명해지고, 기도 역시 깨어있는 기도, 효과적인 기도가 되게 된다.
25. 항상 기도하라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4:2)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다투고 싸운는도다." 인간은 서로 다투고 싸운다. 인간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으려고 남에게 해를 입힌다. 구해서 얻는다는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모른다.
기도는 가끔마다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기도하라", 이것이 기도의 재자리이며 바른 이름이다. 삶의 모든 영역들, 모든 긴급 상황, 평온한 시간들, 힘든 싸움으로 지친 시간들,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기도가 자리해야 할 곳들이다. 기도는 정해진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며, 필요가 생길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의 가족과도 같아서 우리 삶의 다양한 모든 영역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되어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엡6:18-19)
만일 우리가 가장 선한 것을 원한다면,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 없이는 거기 이를 수 없다. 우리는 범사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아뢰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엄숙하고도 진지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을 시간과 관련하여 표현해본다면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만 한다. 우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무시로' 기도해야 한다.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는 것이다.(딤전2:1) 그리고 교회를 생각할 때면 우리는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해야만 한다.
야고보는 말한다. "하나님께 순복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주 앞에서 낮추라." 이것은 다 기도의 한 부분이요 요소들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요10:10)
기도를 필수요소로 요구하는 생명은 바로 이러한 생명이다. 그것이 참 생명이요, 변치 않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과학 공식을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기도가 빠져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삶에는 축복의 역사가 빠져있다. 기도는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건강한 크리스챤이 되려면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범사의 기도가 빠져있다면 그는 온전한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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