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스크랩] 하나님의 두번째 명령 욘 2:10-3:10

은이dii 2011. 1. 11. 14:01
 

3. 하나님의 두번째 명령

욘 2:10-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10)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토함을 받아 살아난 것도 기적이지만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여 집단적 부흥운동이 일어난 사실이 또한 기적입니다.

육신적 기적은 기적이라고 보지만 많은 사람이 영적인 기적에는 기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들었을 때 사람이 낫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면서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새 사람 되는 기적을 흔히 알지를 못합니다.

요나서에 흐르는 깊은 흐름은 요나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보다 요나의 이 기적에 못지 않게 니느웨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집단적으로 회개시키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회개 운동은 요나가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요나 자신이 스스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을 한 다음에 비로소 이 회개 운동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 운동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요나가 순종하면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하실 터이니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주권적으로 계속해서 주장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들 가운데 나 아니면 교회가 안되는 것처럼 나 때문에 교회가 굴러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의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하나님의 자비


1).재명령


“여호와의 말씀이 두변째 요나에게 임하니라”(3:1)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자격 상실을 당한 요나,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완전히 링아웃을 당해야 할 그런 처지에있는 요나에게 두번째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두번째’하셨다고 하는 말은 보통 은혜가 아니라 엄청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거절하고 불순종하고 배신하고 도망가는 그런 자를 자기 목적을 위하여 다시 사용하셔야만 되는 자존심도 없는 수치 스러운 하나님이신가. 그렇게도 사람이 없어서 수욕을 당하시면서 까지도 그 일을 수행하셔야만 하는 분이신가.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역자를 들어서 자기의 뜻을 퍼나가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우리는 성경 역사를 통해서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 중에 하나님의 종이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번째 우리를 불러 주셨기 때문에, 세번째 우리를 찾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전도사 목사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장사가 없습니다.

여호수아24장 2절 이하와 이사야 51장 2절을 보면 우상 장사의 아들로 우상 숭배를 하는 환경에서 자란난 아브라함을 그런 가족으로 남아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세기 31장에서 라헬이 아버지의 우상을 섬겼다는 기사를 보면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불러내신 지 적어도 삼 세대가 지난 후까지 아브라함의 가족, 친척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어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환경이 우상으로 가득한 그런 형편 없는 그를 하나님은 불러 약속한 땅으로 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가지 않고 팔레스타인에서 수백마일 떨어진 하란 땅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므라함이 하란에 오래 머물러 있을 때에 하나님이 다시 두번째 불러 주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도 계속해서 거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을 때 그는 이래의 선교사역을 망쳐 버리고 그에게 주어진 기회를 완전히 잃어 버렸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요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게 된 인간이 광야로 쫓겨가서 남의 집 머슴살이 노릇이나 해야 되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되고 어떻게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완전히 버림을 당했고 완전히 소망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그를 40년 후 불붙는 떨기나무 속에서 하나님은 다시 불러 주심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출3:10).

주님은 세번 씩 부인하고 주님을 떠나갔던 베드로, 주님을 배신 했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로 남아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홀하신 주님은 세번씩 질문을 하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다시 찾으셨습니다(요21:15-18).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여기 두번째라는 말은 단순한 순서적인 두번째는 아닙니다.

이것이 열번째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백번째가 될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천번, 만번째가 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불러 주시고 재차 권면하시고 또 명령에 주시고 다시 우리를 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다윗에게 요나에게 베드로에게 십자가의 강도에까지 미쳤던 이 놀라운 자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지금도 두번째 임하고 계신 것입니다.

심판대신에 이 자비를 항상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2).동일한 명령


“일어나 저 큰 성을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3:2)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시 부르시고 두번째 주신 소명이 다른 명령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번째 불쌍해서 자기 뜻을 조금 가감시키거나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처음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십니다.

도망간 자에게는 다른 명령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불변합니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뜻은 우리의 환경이 달랐졌다고, 우리의 기회가 없어졌다고, 변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같은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처럼 아직도 하란에 머물러 계시지는 않습니까. 모세처럼 자기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아직도 미디안 광야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리에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요나처럼 실체로 하나님의 눈을 피했다고 생각하며 멀리멀리 도망친 자리에서 머뭇 거리고 있지는 않는지 므르겠습니다.

교회에 출석을 한다고 반드시 하나님과 가까워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두번째 아니 스무번째, 삼십번째라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치 맙시다.

999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재차 떨어질 때에 다시 올 수 있었던 요나처럼,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놀라운 부흥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3:9상)


영적인 부흥운동은 결국 요나가 순종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인간의 지혜나 경험으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를 하나 발견해야 됩니다.

3장 3절의 초두에 우리말 성경에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도 1장 3절의 ‘그러나’처럼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이 단어가 빠진 것은 매우 유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응답은 ‘그러나’가 아니고 ‘그러므로’가 되어야 합니다.

1장에서는 ‘그러나 하지 않고’ 였고 3장에는 ‘그러므로 하고’가 되어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러나’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 ‘그러나’로 응답하셔서 요나를 그대로 두시지 아니하시고 요나로 하여금 자기 길로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니의 ‘그러나’가 요나의 ‘그러나’보다 더 큰 ‘그러나’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지금 음직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요나의 ‘그러나’속에는 요나의 도피행각이 있고 불순종의 있고 하나님의 ‘그러나’ 속에는 폭풍이 있고 선원들의 구원이 있고 준비된 고기가 있고 요나의 회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속에는 요나의 외침이 있고 니느웨 백성의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요나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게 되었고 그 말씀이 요나와 함께 있어서 요나는 그 말씀을 우렁차게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니느웨는 큰 회개가 일어났고 그 회개운동의 결과로 부흥히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상 부흥은 언제든지 호개 운동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개인의 부흥과 가정 부흥, 개인의 부흥을 출발시킵니다.

회개의 복음을 들은 니느웨 백성이 요나의 목소리, 요나의 말, 요나의 단어를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3:5).

신앙의 근거는 전파하는 메신저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메시지를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시며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민23:19).


늘 하나님께 순종하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이 부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거역하십니까. 이웃에 손해를 끼칠 것입니다.

생활 가운데 ‘그러나’가 많은가요? ‘그러므로’가 많은가요? ‘그러므로’의 주인공이 됩시다.

십자가 복음을 ‘피복음’ ‘송아지 복음’이라고 배척하는 이 악한 세대에 나아가 피의 복음, 회개의 복음을 외칩시다.  민족이 살고 세계가 사는 길입니다.


3.감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3:10)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시며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고 했는데(민23:19) 요나를 통해 40일 후면 무너뜨린다고 하신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 ‘뜻을 돌이키셨다’고 했으니 모순 같고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도 마음을 변하시고 자기 생각을 돌이키시는 분이신가, 밀 사항까지 아시고 뜻을 정하시는 분이 때를 따라 자기의 뜻과 계획을 조정하시는가 신학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민수기의 말씀과 이 부분의 말씀이 전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멸망시키겠다는 니느웨는 사악한 니느웨, 강포가 있는 니느웨, 불의하고 말씀을 들어도 감각이 없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고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용납받지 못할 니느웨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을 돌이킨 니느웨는 회개하고 새로워진 니느웨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니느웨, 깨끗한 니느웨, 새 모습으로 변신된 니느웨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저주하시고 멸망케 할 원인이 사라진 것입니다.

니느웨는 외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네모 반듯하다가 갑자기 원형으로 되었다든가 산의 높이나 성의 길이가 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로운 도덕적인 국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나라, 믿는 백성으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지노를 면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악된 니느웨를 심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케 하여 구원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흥이 오는 길은 두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 선포와 성실한 경청(순종)입니다.

말씀 선포가 없이 조직을 아무리 잘하고 행정을 잘하고 별 재간을 다 부려도 부흥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잠간은 될지 모릅니다.

잠시는 부글부글 끊는 것 같고 왕창 모이는 것 같다가 쉬 사라집니다.

이단의 특징은 두고 보면 아는 것입니다.

가짜는 처음에는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넘지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점점 더 열매가 맺어지는데 그것이 부흥의 단계입니다.

니느웨 백성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믿게 되었고 믿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했으니 합당한 행위가 따라온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하나님 앞에 제사했고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전부 쉬운 일이 아니며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행한 것입니다.

니느웨의 회개는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떠날 것을 떠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버릴 것을 버리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인간의 고집으로 꽁꽁 묶여 있어서 떠날 것을 떠나기가 그렇게 힘듭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성격 개조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의 열매는 성격개조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믿고 새 사람 되는 것은 영혼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품격이 완전히 예수님의 품성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모든 생활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든 상태가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눈을 뜨면 죄요, 입을 벌리면 죄요, 생각을 하면 죄요, 가깝게 멀게 있는 것이 모두가 죄인데 이 죄를 떠나야 합니다.


니느웨 백성과 같이 죄를 더나지 못하는 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회개와 열매를 맺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 낙송의 집
글쓴이 : 낙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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