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죽은 사람의 손에 낟알을 쥐어 주고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무덤을 파보았을 때 4,000년이 지난 후인데도 매장되었던 여러 개의 낟알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만일 이 밀알 중 하나가 땅에 떨어져 정상적으로 번식했더라면 20년 만에 전세계의 밀 생산량과 같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씨는 식물의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자신을 재생산합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희생-자신의 평안, 물질적 이익, 쾌락, 여가에 대해 자발적으로 죽는 것만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시 태어나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는 것입니다.
당신도 자신의 삶만을 위해 전전 긍긍하면서 열매 없는 빈 껍데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 '주님의시선' 카페와 카페지기가 섬기는 '마산시민교회'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2. 마산시민교회가 주님의 전도전략을 따라 제자삼는 사역을 통하여 주님의 지상명령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고귀한 희생
(요12:24?26)
알프레이트 뒤러와 그의 친구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화가를 찾아가 그림을 공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뒤러의 친구가 “여보게 우리 둘이 함께 그림공부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어렵겠네. 그러니 내가 돈을 벌테니 자네가 먼저 공부를 하게. 그후에 내가 하면 되지 않겠나?” 뒤러는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친구는 애원을 하면서 하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후로 친구는 접시닦이, 청소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뒤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그림공부를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뒤러의 작품이 팔리게 되고 그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친구와 임무교대를 하기 위해 친구가 일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뒤러는 “하나님, 저는 이제 손이 굽고, 감각을 잃어서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뒤러만이라도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친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터지고 상한 손을 맡잡고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본 뒤러는 감동을 받았고, 자기를 위해 희생하며 기도해 준 친구의 손을 즉석에서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이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성화입니다. 친구의 값진 희생이 친구의 성공을 도왔고, 소방관의 값진 희생이 쓰러져 죽어가는 시민을 살리고, 어머니의 값진 희생이 어린 아들을 건졌다는 얘기들은 너무도 흔히 듣는 얘기들입니다. 값진 희생은 반드시 값진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이 인류에게 큰 소망이 됐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밀알에 관한 말씀을 통해 고귀한 3가지의 희생에 대해 함께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섬겨야 커진다는 것입니다.(정신적)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농부가 하나의 밀알을 정성껏 다룹니다. 한게의 씨앗이라도 아무렇게나 取扱(취급)할 수 없습니다. 정성껏 다루어야 많은 열매를 따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성껏 씼어야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성껏 보관해야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 못하는 씨앗이라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잘 모셔야, 잘 섬겨야 합니다. 말 못하는 신발이라고 함부로 합니까? 아닙니다. 잘 닦아야 합니다. 신발이 더러우면 자기 얼굴 깍이는 것입니다. 옷도 잘 손질을 해서 입는 이유는 그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왜 그렇게 닦고 씻고 칠하고 야단입니까?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고, 힘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나’좋아지라고, ‘나’커지게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성자 두 사람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그리스도께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뵈러 가는 길이라 모두 흰 예복을 준비하여 입고 길을 걸어갔습니다. 카시안스란 사람이 길을 가는데, 진흙수렁에서 짐 수레를 끌고 땀을 뻘뻘 흘리는 짐꾼을 만났습니다. 아무리 봐도 혼자서는 진흙투성이의 수레를 끌고 언덕을 오르기가 힘들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도와줘야지. 나보고 그래도 사람들이 성자라고 말을 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야 있겠는가?’하고 도와주려고 하다보니 흰옷에 흙이 묻으면 예수님께 큰 실례가 될것만 같았습니다. ‘오늘은 예수님 만나러 가는 길이니 바쁘다. 그러니 그냥 갈 수 밖엔 없구나’ 마음은 간절했지만 도와주지 못하고 그냥 그곳을 지나쳤습니다. 그 뒤를 이어 성자 니콜라스가 흰 예복을 입고 그 길을 가다가 진흙투성이의 짐수레를 만났습니다. 니콜라스는 예수님 뵈러가는 길이 바빴고, 흰 예복이 소중하게만 보였지만 짐수레를 끌고 혼자 애쓰는 짐꾼을 보고 그냉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도와 짐수레를 높은 언덕까지 올려다 주었습니다. 이러다가 시간이 좀 늦었습니다. 그를 도와주다가 예복에 흙이 잔뜩 묻었습니다. 두 성자가 예수님께 섰습니다. “그대들은 오늘 여기 오는중에 누구를 만났느냐?” 카시안스가 “예. 진흙길에서 무거운 짐을 잔뜩 싣고 혼자 애쓰는 짐꾼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 광경을 보고 그대는 어찌 했는가?” “주님 뵈러 오는 길에 옷이 더러워질까봐, 시간이 늦을까봐 돕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그냥 지나쳐 왔습니다.” 그때 니콜라스가 “예 저는 그 사람을 보는순간 너무 안쓰러워서 달려가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예복을 더럽혔고, 시간이 좀 지체됐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잘 하였도다. 그대는 영원한 성자일찌라. 영원한 성자의 칭호를 받게” 예수님의 위대함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고, 자기 몸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다는데 있습니다. 섬기는 밀알은 위대합니다. 봉사할 때 커집니다. 썩는 밀알은 봉사자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섬김을 통해 커지는 축복을 소유하십시다.
2. 버려야 얻습니다. (물질적) 한 개의 밀알을 땅에 버렸을 때 많은 열매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아브라함이 기름진 소돔의 옥토를 버렸습니다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더 좋은 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을 포기했던 아브라함이 잘 됐나요? 아니면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든 롯이 잘 됐나요? 보세요. 살기 좋다고 소돔, 고모라 성을 택했던 롯은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의 좋은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챙피스러운 일생을 토굴속에서 마쳤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잃어버리는 사람이 됐습니다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포기할 줄 알았던 아브라함은 318명의 군사를 거느릴 만한 거부가 됐다는 사실입니다.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도와주시며 사는 넉넉한 삶을 살게 된것입니다. 한 웅큼의 밀가루, 몇 방울밖에 남지않은 기름을 포기할 수 있었던 사르밧 여인은 밀가루와 기름을 아주 잃어버리지를 않았습니다. 딴 사람들이 배고파서 가물어서 아우성치는 비참한 상황속에서 구원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리아가 버렸던 옥합과 그 향유 때문에 마리아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여인으로 칭송을 받게 됐습니다. 그것 버리지 않고 자기 앞으로 끌어들였드라면 마리아의 존재는 기억될 수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경제관은 거룩한 낭비를 토대로 쌓아져 가고 열매맺는 경제관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사도행전 230장 35절에서 말씀합니다. 농부가 아깝다고 씨앗을 땅에 버리지 않는다면 그 농부는 거지가 되고 말것입니다. 이 때를 위하여 농부는 씨앗을 손질하고 관리하여 잘 보관해 온것입니다. 한 개의 밀알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버려야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 죽어야 삽니다. (생명, 외체적)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마16:25, 막8:35, 눅9:24,17:33) 自我(자아)라고 하는 自己(자기), 自身(자신)이라는 육체, 나라고 하는 개인감정, 감각적인 인생의 모습이 깨지고 바스러지고 녹아질 때 내 안에 영이 살고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는 것은 껍데기가 썩는 것을 말합니다. 겉모양, 알맹이는 싸고 있던 것들이 깨지고 썩어질 때 속에 있는 알맹이가 활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라는 말이 생길 만큼 순교자들의 희생, 그들의 죽음이 있었기에 오늘의 교회가 발전되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았던 신앙의 선배들 때문에 우리가 편안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게 된것입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覺悟(각오)를 가지고 삼일을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아하수에로왕에게 나갔을 때 에스더도 살고 모르드개와 그 민족이 사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다니엘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바벨론 나라의 금령을 어기면서까지 신앙을 지켜나갈대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풀무불에 던짐을 받아도, 사자굴속에 갇혀도, 하나님을 위하여,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을 때 그들이 죽지않고 살아나온 줄 믿습니다. 북미에 Saimon이라는 고기가 있습니다. 바다에서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났던 강에 다시 올라와 알을낳아 부화하기까지 살다가 어미고기는 곧 죽는다고 합니다. 어미가 죽어야 그 새끼 고기들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새끼들은 죽은 어미 몸에 붙어 어미의 살을 먹으면서 자란다고 합니다. 어미고기가 죽어야 그 새끼들이 죽지않고 살아남아 더 많은 고기들을 번식시킬 수 있기에 어미는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가고 오는 세대에 사는 수많은 인류들에게 구원의 빛을 주셨습니다.
흑암에 거하는 어두운 인생들에게 밝은 빛을 주시려고 주님이 어둡게 되셨고, 죽음에 거하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려고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부유함을 주시려고 주님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밀알이 주는 교훈은 섬겨야 커집니다. 버려야 얻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교훈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