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일천번제
왕상3:4-15절, 93.204.415장.*
본문 말씀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너무나 고마워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일천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솔로몬의 이같은 일천 번제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일천 번제란 무엇인가? 아직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되기 전입니다(3:2절). 그래서 백성들과 솔로몬 왕은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립니다(3절). 솔로몬 왕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기브온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 산당은 매우 컸습니다. 솔로몬은 그 단에서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기 일천 번제란 한 번 제사를 드리는데 제물이 천 개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제사를 천 번 드렸기 때문에 일천 번제입니까?
우리들은 보통 알기로는 솔로몬이 번제의 제사를 일천 번 드렸기 때문에 일천 번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이런 일천 번제를 드렸듯이 "우리들도 헌금은 천번 하자”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가 번제의 제사를 일천 번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제사에 일천 개의 제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한 번 제사에 일천 개의 제물이 드려졌기에 제사 드리는 장소가 넓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고 합니다.
또한 역대하 1:5-6절에 보시면 "옛적에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사렐의 지은 놋단은 여호와의 장막앞에 있더라 솔로몬이 회중으로 더불어 나아가서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고 합니다.
희생 제물이 일천이지 번제를 일천번 드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역대하 35:7절에도 보면 그 당시에 제사를 드릴 때 많은 희생 제물이 한꺼번에 동원된 기록이 있습니다.
"요시야가 그 모인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과 수소 삼천을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제란 헌신의 제사입니다. 솔로몬 왕은 자신뿐만 아니라 온 백성들을 대신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까지를 포함해서 일천 희생의 제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생명과 같았습니다. 제사 때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 제물을 드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 하나님은 그 제물을 열납하셨습니다.
그 제물을 열납해 주시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번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입니까?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구약의 말씀 가운데 어떤 형태로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인가가 논의되어져야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됩니다.
구약의 왕들이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드린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은 헌금을 일천 번 하라는 것으로 적용합니다.
구약의 제사에 해당된 제사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로 설명하지 않고 헌금으로 적용하면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 많이 있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들의 구원자로 오셔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구약의 제사가 예수님으로 성취되었다면 이제 제사를 드리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 제사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구약 제사를 성취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시킨 결과입니다. 오늘날 솔로몬의 일 천 번제를, 즉 제물의 희생을 통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시켜 설명해야 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 잘 설명(說明)해 주고 있는 복음(福音)의 진리(眞理)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일천 희생의 제물을 예수님에게로 연결시키지않고 우리들의 천번의 헌금 봉투로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을 히브리서는 용납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희생의 제물로써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의 부활은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전제합니다. 또한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곧 부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진리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셨고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불안과 근심, 걱정과 좌절이 우리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우리 나라에 경제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저희들의 주님이십니다. 저희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담대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3.솔로몬의 축복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솔로몬이 이런 일천 번제를 드린 이후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의 마음에 맞은 자"(11절)가 되었습니다.
또한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12절)고 합니다.
또한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3:13)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받은 복이 어떤 복인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조명 해야 합니다. 이같은 복은 보통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복 주실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에게 이런 축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출생부터 보십시오. 삼하12:24-25절에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 이해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그래서 사55:8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사14:24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지각을 열어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통하고 난 다음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가 있는, 밧세바의 남편을 불러들입니다. 불러들여 그의 아내와 동침하게 하여 간통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합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아는 아내의 침실로 가지 않고 그냥 왕궁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삼하11:11). 다윗은 결국 자신의 불륜을 숨길 수 없어서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우리아가 죽자 처음 밧세바와 관계를 맺어 낳은 아이는 죽습니다.
그래서 삼하12:24절은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했다"고 했습니다. 밧세바 남편인 우리아가 죽자 다윗은 "밧세바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 을 솔로몬이라 하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밧세바에게서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솔로몬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견해로 놓고 보면 솔로몬은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더 가까운 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좋지 못한 관계 속에서 태어난 자였습니다.
그런데 삼하12:24절 하반 절과 2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솔로몬)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고 합니다.
본문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서 큰 축복을 받습니다. 여기서 솔로몬이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솔로몬의 출생에 대한 족보를 이야기하고 있는 마1장의 말씀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1:6절에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여기서 우리아가 등장합니까? 솔로몬은 이미 우리아가 죽은 이후에,
밧세바를 데려 와서 다윗이 동침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 솔로몬은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하지않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면서 우리아를 언급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족보에서 룻이나 다말이라는 여인들의 이름을 그대로 언급하고 있는데 솔로몬을 이야기할 때는 분명히 그의 어머니 밧세바를 언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밧세바는 언급하지 않고 이미 죽어 없는,
우리아를 언급하면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솔로몬의 탄생이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같은 사건에는 하나님의 메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거룩하지 못한 하나님의 대적인 이방나라를 치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 있을 때 왕궁에서 다윗은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아는 아무 이유 없이 다윗의 죄 때문에 대신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말없이 어린양과 같은 희생이었습니다. 밧세바는 말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을 당했던 우리아의 아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솔론몬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출생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와 같이 어린양과 같은 희생과 섬기는 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참으로 섬기는 자로서 희생자의 의미가 솔로몬의 출생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디디야"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설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과 같이 말없이 희생의 제물로 드려진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들 역시 어떠한 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먼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바로 섬기는 자, 죽고자 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결국 그런 자가 큰 자입니다. 솔로몬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들은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마음에 맞는지라"(왕상3:10절)고 하면서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능력과 조건이 나에게 있어서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우리는 기도에 임해야 합니다. 이런 정신이 아닌 기도는 언제나 자기 자랑일 뿐입니다. 그것은 커다란 함정이요, 자신의 영혼을 황폐화시킬 것입니다.
솔로몬을 "여디디야"라 했습니다(삼하12:25). 즉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물이 되는 인물이 다윗을 이어 언약의 계열인 유다왕국의 왕이 됩니다.
그가 바로 솔로몬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그 모든 아들 중에서 내 아들 솔로몬을 택하사 여호와의 나라 위에 앉혀"(대상28:5)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어린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되었듯이 어린양 되신(요1:29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강조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진리와 하나님의 자비를 다윗과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같은 구원의 복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이런 복음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지면 안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모래알 처럼 많은 사람가운데 선별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심은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때을 얻든지 못얻든지 만백성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주심과 장사 된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며 재림주로 심판주로 다시 이 땅에 오시리라는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상3:4-15절, 93.204.415장.*
본문 말씀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너무나 고마워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일천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솔로몬의 이같은 일천 번제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일천 번제란 무엇인가? 아직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되기 전입니다(3:2절). 그래서 백성들과 솔로몬 왕은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립니다(3절). 솔로몬 왕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기브온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 산당은 매우 컸습니다. 솔로몬은 그 단에서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기 일천 번제란 한 번 제사를 드리는데 제물이 천 개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제사를 천 번 드렸기 때문에 일천 번제입니까?
우리들은 보통 알기로는 솔로몬이 번제의 제사를 일천 번 드렸기 때문에 일천 번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이런 일천 번제를 드렸듯이 "우리들도 헌금은 천번 하자”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가 번제의 제사를 일천 번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제사에 일천 개의 제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한 번 제사에 일천 개의 제물이 드려졌기에 제사 드리는 장소가 넓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고 합니다.
또한 역대하 1:5-6절에 보시면 "옛적에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사렐의 지은 놋단은 여호와의 장막앞에 있더라 솔로몬이 회중으로 더불어 나아가서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고 합니다.
희생 제물이 일천이지 번제를 일천번 드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역대하 35:7절에도 보면 그 당시에 제사를 드릴 때 많은 희생 제물이 한꺼번에 동원된 기록이 있습니다.
"요시야가 그 모인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과 수소 삼천을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제란 헌신의 제사입니다. 솔로몬 왕은 자신뿐만 아니라 온 백성들을 대신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까지를 포함해서 일천 희생의 제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생명과 같았습니다. 제사 때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 제물을 드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 하나님은 그 제물을 열납하셨습니다.
그 제물을 열납해 주시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번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입니까?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구약의 말씀 가운데 어떤 형태로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인가가 논의되어져야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됩니다.
구약의 왕들이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드린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은 헌금을 일천 번 하라는 것으로 적용합니다.
구약의 제사에 해당된 제사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로 설명하지 않고 헌금으로 적용하면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 많이 있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들의 구원자로 오셔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구약의 제사가 예수님으로 성취되었다면 이제 제사를 드리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 제사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구약 제사를 성취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시킨 결과입니다. 오늘날 솔로몬의 일 천 번제를, 즉 제물의 희생을 통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시켜 설명해야 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 잘 설명(說明)해 주고 있는 복음(福音)의 진리(眞理)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일천 희생의 제물을 예수님에게로 연결시키지않고 우리들의 천번의 헌금 봉투로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을 히브리서는 용납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희생의 제물로써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의 부활은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전제합니다. 또한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곧 부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진리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셨고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불안과 근심, 걱정과 좌절이 우리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우리 나라에 경제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저희들의 주님이십니다. 저희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담대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3.솔로몬의 축복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솔로몬이 이런 일천 번제를 드린 이후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의 마음에 맞은 자"(11절)가 되었습니다.
또한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12절)고 합니다.
또한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3:13)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받은 복이 어떤 복인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조명 해야 합니다. 이같은 복은 보통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복 주실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에게 이런 축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출생부터 보십시오. 삼하12:24-25절에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 이해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그래서 사55:8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사14:24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지각을 열어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통하고 난 다음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가 있는, 밧세바의 남편을 불러들입니다. 불러들여 그의 아내와 동침하게 하여 간통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합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아는 아내의 침실로 가지 않고 그냥 왕궁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삼하11:11). 다윗은 결국 자신의 불륜을 숨길 수 없어서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우리아가 죽자 처음 밧세바와 관계를 맺어 낳은 아이는 죽습니다.
그래서 삼하12:24절은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했다"고 했습니다. 밧세바 남편인 우리아가 죽자 다윗은 "밧세바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 을 솔로몬이라 하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밧세바에게서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솔로몬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견해로 놓고 보면 솔로몬은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더 가까운 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좋지 못한 관계 속에서 태어난 자였습니다.
그런데 삼하12:24절 하반 절과 2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솔로몬)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고 합니다.
본문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서 큰 축복을 받습니다. 여기서 솔로몬이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솔로몬의 출생에 대한 족보를 이야기하고 있는 마1장의 말씀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1:6절에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여기서 우리아가 등장합니까? 솔로몬은 이미 우리아가 죽은 이후에,
밧세바를 데려 와서 다윗이 동침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 솔로몬은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하지않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면서 우리아를 언급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족보에서 룻이나 다말이라는 여인들의 이름을 그대로 언급하고 있는데 솔로몬을 이야기할 때는 분명히 그의 어머니 밧세바를 언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밧세바는 언급하지 않고 이미 죽어 없는,
우리아를 언급하면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솔로몬의 탄생이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같은 사건에는 하나님의 메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거룩하지 못한 하나님의 대적인 이방나라를 치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 있을 때 왕궁에서 다윗은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아는 아무 이유 없이 다윗의 죄 때문에 대신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말없이 어린양과 같은 희생이었습니다. 밧세바는 말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을 당했던 우리아의 아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솔론몬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출생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와 같이 어린양과 같은 희생과 섬기는 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참으로 섬기는 자로서 희생자의 의미가 솔로몬의 출생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디디야"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설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과 같이 말없이 희생의 제물로 드려진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들 역시 어떠한 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먼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바로 섬기는 자, 죽고자 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결국 그런 자가 큰 자입니다. 솔로몬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들은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마음에 맞는지라"(왕상3:10절)고 하면서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능력과 조건이 나에게 있어서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우리는 기도에 임해야 합니다. 이런 정신이 아닌 기도는 언제나 자기 자랑일 뿐입니다. 그것은 커다란 함정이요, 자신의 영혼을 황폐화시킬 것입니다.
솔로몬을 "여디디야"라 했습니다(삼하12:25). 즉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물이 되는 인물이 다윗을 이어 언약의 계열인 유다왕국의 왕이 됩니다.
그가 바로 솔로몬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그 모든 아들 중에서 내 아들 솔로몬을 택하사 여호와의 나라 위에 앉혀"(대상28:5)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어린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되었듯이 어린양 되신(요1:29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강조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진리와 하나님의 자비를 다윗과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같은 구원의 복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이런 복음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지면 안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모래알 처럼 많은 사람가운데 선별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심은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때을 얻든지 못얻든지 만백성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주심과 장사 된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며 재림주로 심판주로 다시 이 땅에 오시리라는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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